워싱턴서 울려퍼진 ‘제주 4·3과 미국의 역할’ 논의…“미, 어두운 역사 직시해야…희생자 추모 검토도”
“제주 4·3사건의 진실은 50년 동안 억압됐지만, 역사 화해, 피해 보상이 이뤄지면서 새로운 내러티브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과제 하나는 미국 정부가 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문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
제주 4·3 사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공론화하는 학술행사가 지난 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됐다. 미 싱크탱크 윌슨센터가 주최하고 제주특별자치도, 제주4·3평화재단, 월든코리아가 공동 주관한 심포지엄 ‘제주 4·3과 인권, 그리고 한미동맹’이다.
미군정기인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로 촉발된 제주 4·3사건은 토벌대의 ‘초토화작전’ 등 강경 진압으로 제주도민 약 10분의1에 달하는 2만5000명~3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4·3 진상조사보고서).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많은 인명피해를 기록한 사건이다. 특히 사망자의 21%가 여성이었고, 10세 이하 어린이와 61세 이상 노인 사망자도 11%에 달하는 등 무고한 양민의 희생이 컸다.
이날 심포지엄은 이례적인 논의의 장이었다. ‘4·3과 미국’은 미국의 대다수 한반도 전문가들이나 직접 한·미관계를 다루는 미 정부 당국자들에게 여전히 생소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이라면 제주 4·3은 금지된 주제였다”(허호준 한겨레신문 선임기자)는 평가가 이를 뒷받침한다. 심포지엄에 참가한 한·미 전문가들은 제주 4·3에 관한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인식을 널리 확산하고, 인권적 관점에서 미국 정부가 희생자 추모 등 성의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수미 테리 윌슨센터 아시아프로그램 국장(현대자동차-국제교류재단 한국 역사·공공정책 연구센터장 겸임)이 좌장을 맡은 1부에 발표자로 나선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 대사는 미국이 4·3 사건의 역사적 사실을 “고통스럽지만 직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이 스스로 내세우는 인권 등 이상을 실현한 적이 드물지만 미국은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볼 기회가 있다”고 했다.
스티븐스 전 대사는 “일반적으로 한미관계의 출발점을 6.25 전쟁이라고 생각하지만 해방 이후 미군정기 어려운 시기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한미관계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라고 했다. 그는 “4·3사건과 관련 한국인들은 꾸준히 진실을 추구하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했다. 미국도 당연히 이와 같은 노력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1996년 4월 제주에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과 빌 클린턴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4·3사건이 논의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어떤 면에선 기회를 놓친 것”이라면서도 “당시 한국 내에서도 화해 문제가 거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시대의 반영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고통스러운 역사 직시해야” 스티븐스 전 대사
“미국의 양심에 호소한다” 양조훈 위원
“미 대통령 제주 방문, 인권 수호 의지 보여줄 것” 이성윤 교수
양조훈 제주4·3중앙위원은 미군정이 남한의 단독선거 실시에 대한 제주도민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재선거 실시·체포작전 등에 가담했고, 미 비밀문서에서 초토화작전을 칭찬하는 내용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양 위원은 “우리의 활동이 거대한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럼에도 계란 던지기를 시작해야 한다. 미국 언론, 종교단체, 시민단체, 양식있는 학자 등 미국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가 4.3사건에 대해 당장 ‘사과’는 아니더라도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와 연대 메시지를 낼 것을 제언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미 터프츠대 이성윤 교수는 “75년 전 미군정은 민주주의·인권·평화·정의 등의 ‘안티테제’라고 할 수 있는 제주 4.3을 사건을 사실상 감독(oversee)했다. 한국군은 미군정 작전통제권 하에 있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러면서 조 바이든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이 제주 4.3 평화공원을 함께 방문한다면 “미국이 동맹국의 인권을 소중히 여기고 어두운 역사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16년 5월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이 원자폭탄을 투하한 히로시마를 방문했던 사례를 들어 “6년 반이 지났지만 우리는 그 방문을 도덕적 행위로 기억한다”며 “미국 의원이나 부통령, 대통령의 제주 방문도 그와 같은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 이사장도 “미국 정부가 희생자들에게 어떤 노력을 보일 것인지가 남아있는 과제”라며 “먼저 미 대사관 관계자들이 추모하고 추후에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이 제주도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평화공원을 방문한다면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는 길이 되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1975년 국내외 학계에서 처음으로 제주 4.3 사건에 대한 논문을 쓴 존 메릴 전 국무부 정보조사국 동북아실장은 4·3의 국제적·현재적 성격을 강조했다.
메릴 전 실장은 “제주 4.3 봉기(Uprising)는 마치 봄비를 맞은 대나무 죽순이 피어나듯이 2차 세계대전 종전, 식민주의 종언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확산된 대중봉기의 한 사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보다 넓은 관점에서 4.3을 연구하고 대만이나 동남아시아 여타 국가에서 일어난 양민학살 희생자들과 연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한 “미군정이 초기에는 인민위원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자치도 보장했지만 냉전 현실이 닥치면서 통제를 강화하게 됐다”며 미군 함대의 제주 해안 순찰, 서북청년단과 미군정의 긴밀한 관계 등을 4.3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말해주는 사례로 들었다.
군사화된 제주에 핵전쟁 등 잠재적 폭력의 씨앗 도사리고 있다.
- 존 메릴 전 국무부 동북아실장
메릴 전 실장은 특히 해군기지 건설 이후 “군사화된” 제주가 동북아 군비경쟁의 또 다른 희생양이 될 수 있다며 “오늘의 제주에서도 잠재적 폭력의 씨앗이 도사리고 있다”고 우려했다. 북핵 고도화, 이에 대응한 한국의 ‘핵무장 검토’ 등 군비경쟁 고조로 인해 제주가 핵 위협의 자장 아래 놓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그러면서 “4·3 등 역사적 사건 해결만이 아니라 한국 문제에 미국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라며 “바이든 정부가 한국 통일 문제를 보다 심각하게 다뤄야 하지만, 현재는 좀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 | 김유진 특파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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