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미래, 생물·무생물의 모호한 경계…그 속에서 발견한 미학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양혜규, 시간·문화 등 개념 다원적 접근
시공간 초월 콘셉트 전시 신선함 선사
베네세상 수상作 ‘무성한 전기 이인조’
사물 향한 인식의 한계 새 관점서 표현
우주+림희영, 기계문명·예술 결합 시도
다양한 매체 활용 사회 전반 모순 지적
미래 관한 상상서 시작된 ‘플라스틱…’
상상 속 ‘허구’ 의미 있는 존재로 다가와
#12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시간
한파가 몰려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상 고온이라던 가을은 빠르게 사라졌다. 그리고 가을이 사라진 속도로 겨울이 왔다. 어느덧 사계의 끝에 다다른 지금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이다. 동시에 다가올 미래를 떠올려볼 시간이기도 하다. 현재에 충실히 하자는 매일의 다짐을 내려놓아도 마음이 가볍다. 자유롭게 과거와 미래를 비행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풀어 둔다.
2019년 전시 당시 관람객은 전시장에 들어서면 이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노래가 가리키는 미래의 시점을 훌쩍 지나버린 위치에서 과거의 희망을 바라보았다. 2000년은 과거와 미래의 시간이 동시에 녹아 있는 시점으로 듣는 이가 시간을 복합적으로 느끼게 했다. 이 복합적인 감각은 작품과 함께 전시장에서 시공간의 맥락으로 확장,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이처럼 남다른 시각예술 구조를 구축하는 양혜규는 최근 싱가포르 비엔날레가 주최하는 제13회 베네세 상(Benesse Prize)을 받았다. 베네세 상은 그동안 국제적 명성을 가진 작가들을 역대 수상자로 선정하며 권위를 쌓았다. 수상자 가운데는 올라푸르 엘리아손(Olafur Eliasson),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 등이 있다.
작가의 베네세 상 수상작은 ‘하이브리드 중간 유형 - 무성한 전기 이인조(The Hybrid Intermediates ? Flourishing Electrophorus Duo)’(2022)다. 이 작품을 선보인 제7회 싱가포르 비엔날레 전시장을 살펴보면 그 한가운데는 인체 규모의 두 조각이 서 있다. 쌍둥이처럼 유사한 조각들은 전기 콘센트 형태로 음각과 양각으로 번갈아 나타난다. 콘센트는 일상생활 속에서 벽에 고정, 전기가 통하는 보조 역할을 하지만 여기서는 하나의 존재, 객체로 온전히 홀로 섰다. 사물, 상황, 현상 등에 관한 인간 인식과 그 한계에 대해 가져온 작가의 관심을 시각화한 결과물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
연말이라는 복합적 시간 속에서 올해는 유독 다가올 시간, 미래에 관한 생각을 펼치게 되었다. 얼마 전 우연히 방문한 전시장에서 만난 우주+림희영의 작품 때문이었다. 우주+림희영은 우주(유병준, 1976)와 림희영(임희영, 1979)이 구성한 팀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부산 비엔날레 등을 비롯해 브뤼셀, 마드리드, 피츠버그, 맨체스터 등 주요 미술 기관 및 행사에서 전시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현대자동차 등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 작품은 작가들의 미래에 관한 상상에서 출발했다. 미술관 설명에 따르면 작가들은 “몇만년의 시간이 흐른 뒤 미래의 지적 생명체가 발견한 플라스틱 화석으로부터 멸종된 존재의 소리가 흘러나온다는 상상”을 했다. “축음기의 원리를 응용한 기계장치는 폐플라스틱 조각 위에 각종 소리를 기록하여 레코드처럼 재생”하는 장면이었다. 플라스틱 분해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몇만년 뒤에는 분명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화석으로 발견되었다는 이들의 상상은 먼 미래 속 우리의 흔적이 어떻게 남겨질지에 관한 생각을 하게 한다. 환경적 이슈에 직면한 인류 상황 속에서 우리 가치와 흔적을 미래까지 지키는 방법을 고민하게 만든다.
작가들의 대표 작품 가운데는 ‘나쁜 꿈을 꾸는 기계’(2010)가 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을 대신 꿔주는 존재를 기계 형태로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처럼 ‘플라스틱으로부터의 노래’에서 손으로 감각할 수 있는 오브제를 활용한 것은 작품에 관람자를 결부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소설, 만화 속에서 허구였던 이야기가 물성을 가진 존재의 등장으로 현실처럼 느껴지게 되기 때문이다.
한때는 미래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미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현실이 충만해진다면 그건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현실에 충실히 하는 것처럼, 과거를 되새겨보는 것처럼, 미래에 집중하는 일이 낭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래서 남은 한 달간은 다가올 새해를 생각하며 지난했던 올해를 축복으로 보내주고 싶다.
시간과 관련한 글 가운데 김초엽의 공상과학(SF)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있다. 이 소설에는 또 다른 행성으로 가기 위해 폐쇄된 우주정거장에서 우주여객선을 기다리는 할머니가 나온다. 이제는 운항이 끊긴 여객선을 기다리며 할머니는 다음 같은 말을 한다.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과거의 시간을 두고 현재에서 미래를 소환하며 이 소설을 떠올린다. 그리고 희망을 담아 우리는 어쩌면 빛의 속도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한다.
김한들 미술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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