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전 대통령은 성역이 아니다 [쓴소리 곧은 소리]
미국의 전직 대통령들이나 메르켈 전 독일 총리처럼 은둔생활 하는 게 미덕
(시사저널=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
최근 한 유력 언론사가 전문가들을 상대로 한국 사회에서 영향력이 큰 정치 지도자를 묻는 객관식 설문조사를 하면서 10명을 나열했다. 특이한 점은 답변지에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이어 세 번째로 문재인 전 대통령을 적시했다는 점이다. 나머지 7명은 한덕수 국무총리, 한동훈 법무장관,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 등 모두 '현직'이다. 총 10명의 파워맨 가운데 '전직'은 문재인 전 대통령뿐이었다. 퇴임 이후 '잊힌 삶을 살겠다'던 약속과 달리 지난 6개월 동안 대내외 활동을 열심히 해온 덕분인지, 요즘 민주당 내에서 친문계(친문재인 의원들)는 이재명 체제를 뒤흔들 만큼 막강하다.
민주당 내 친문 정치세력, 이재명 체제 흔들 정도로 막강
그런 '파워맨'이 총체적 위기상황을 맞고 있다. 서해 공무원 피살, 원전 경제성 조작, 울산시장 선거 청와대 개입 의혹, 이정근발 친문 게이트 등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사정 칼날 때문이다. 이를 두고 정치보복이란 주장도 있지만 전직 대통령이라도 성역이나 치외법권은 될 수 없다는 반박이 만만치 않다. '전직 대통령 성역론'에 대해선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대통령의 통치행위를 사법적 잣대로 심판할 수 있는가? 대통령의 통치행위를 사법부가 심판하면 안 된다는 얘기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만 맞는 말이다. 문민정부 들어 대통령의 통치행위는 대부분 사법적 심판대에 올랐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각각 IMF(국제통화기금) 경제파탄과 햇볕정책의 책임을 지고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사법처리를 받았으며,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도 통치행위와 관련해 정치·사법적 책임을 고스란히 졌다. 사실 민주국가에서 '통치'라는 말은 더 이상 사용되지도 통하지도 않는다.
한동훈 법무장관이 12월7일 기자들 앞에서 "헌법과 법률을 초월하는 의미의 통치행위라는 건 민주국가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한 것은 시대적 진실을 반영한 말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민주국가 대통령의 통치논리가 더 이상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는 것은 최근 '트럼프 재판'에서도 드러난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12월6일(현지시간) 자신의 가족기업인 트럼프그룹의 세금 사기와 기업문서 조작 등 17개 혐의에 대해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재임 중 통치행위는 아니지만, 전직 대통령에 대한 미국 사법부의 단호한 태도를 볼 수 있다. 바야흐로 대통령이 '통치(Rule)하는 시대'는 가고 '국정운영(Governance)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두 번째는 대통령 정책행위의 시비를 사법적으로 판단할 수 있겠느냐는 쟁점이다. 만약 윤석열 정부가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나 교육정책 실패에 대한 사법적 책임을 묻겠다면 그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문제가 그렇게 간단치 않다. 예컨대, 윤석열 정부가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이나 탈원전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정책 실행 과정에서 드러난 은폐, 조작 같은 구체적인 위법·탈법 행위를 검찰이 조사하는 것은 어떤가.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사법처리한 것이 아니라 그 정책 과정에서 드러난 불법 대북송금 사건을 사법처리했었고, 당시 임무를 수행했던 박지원 전 국정원장이 옥살이를 했다.
이명박 정부의 4대 강 정책이나 자원외교 정책도 정책 자체가 단죄받은 것이 아니라 정책 과정에서 드러난 불법 비리가 단죄받은 것이다. 요컨대, '정책에 대한 사법적 심판'은 어렵지만, '정책 과정에 대한 사법적 심판'은 가능하다.
"전직 대통령 치외법권 없어진 셈"…현직도 마찬가지
세 번째는 대통령 개인이나 측근 비리에 대한 사법처리 문제다.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출신 인사들은 이를 정치보복의 일환으로 보고 긴밀히 모임을 갖고 공동 대응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최근 문재인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에 대한 수사 속도가 급물살을 타자 임종석 전 비서실장이 전면에 나서 공개 대응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대통령과 참모의 개인 비리에 대해 단호하다. 축구의 나라로 유명한 남미 아르헨티나에서 대통령을 8년 동안 연임하고 현재 부통령으로 재임 중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는, 대통령 재임 중 있었던 공공건설사업 특혜와 뇌물수수 혐의로 6년형을 선고받았다. "국가를 상대로 한 대통령의 사기 혐의"가 유죄판결 이유다. 이쯤 되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민주국가 대통령의 성역과 치외법권은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역대 대통령들은 재임 중 또는 퇴임 이후에 하야, 수사, 구속, 탄핵과 같은 불행한 흑역사를 답습해 왔다. 이런 병폐의 고리를 끊고 전직 대통령이 온전하게 보호받고, 현직 대통령이 편안하게 국정을 운영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오랜 경험칙에 따르면 전직 대통령은 퇴임 후 은둔의 세월을 보내는 것이 현직 대통령을 돕는 길이고,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 민주당을 향해 통합과 햇볕정책의 계승과 관련해 조언 몇 마디 했다가 훈수정치라며 비판을 받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봉화마을에서 방문정치의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아마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가운데 퇴임 이후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사람은 문재인 전 대통령일 것이다. 퇴임정치의 도를 넘은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SNS 활동, 청와대 이전 반대, 민주당 정치인들의 방문, 풍산개 반납 소동, 트럼프 전화, 정치적 발언 등 무수한 사례가 있다.
진보든 보수든 가릴 것 없이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부시, 오바마, 클린턴)이 주요 국가행사나 국민 봉사활동 때 어깨동무를 하고 활짝 웃는 모습을 보면 한없이 부럽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는 16년 동안 재임했고 퇴임 때 지지율이 70%에 이를 정도로 성공한 국가 지도자지만, 퇴임 후 1년이 되도록 칩거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연말연초가 되면 윤석열 정부의 사정 한파는 한층 매섭게 몰아칠 것이 분명하다. 그 어느 때보다 전직 국가원수의 침묵의 미덕이 아쉽다. 아울러 전직 대통령이 성역과 치외법권이 없다면, 현직 대통령도 성역과 치외법권이 없음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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