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AE 지폐 속 대한민국 원자력발전소, 무슨 뜻인가
● ‘과학승리’ 표상하는 기념물로 여겨
● 진보·보수 언론 공히 단신 취급, 왜?
● 美中日 외 국가는 없다는 듯한 행동
● 에너지가 진지한 안보 문제 된 시대
● ‘녹색 착각’ 빠져 살면 100년 지나도…
여기까지는 일반적이다. 하지만 1000디르함 신권 도안은 뭔가 달랐다. 일단 전면에는 자이드가 다시 한 번 등장한다. 그런데 그의 옆에는 우주왕복선과 인공위성이 그려져 있고, 지폐의 왼쪽으로는 우주복을 입은 우주비행사가 손을 들어 인사하는 모습이 보안 요소로 양면 인쇄돼 있다. 뒤집어보면 의아한 마음은 뜻밖의 놀람과 반가움으로 변한다. 2012년 한국전력이 주축이 돼 결성된 컨소시엄 '팀 코리아'가 수출한 바라카 원자력 발전소의 모습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화폐의 도안이란 해당 국가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이나 사물로 구성된다. 그러니 우리가 수출한 원전이 다른 나라의 지폐, 그것도 최고액권의 도안에 들어갔다는 것은 원전 그 자체의 수출보다 더욱 놀랍고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한층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소위 '국뽕' 뉴스에 혈안이 된 한국 언론들조차 이 엄청난 일을 짧은 단신으로 소개하고 마는 정도에 그쳤다는 것이다. '한국 원전의 UAE 지폐 출현 사건', 그 맥락과 함의를 짚어보면서 오늘의 논의를 시작해보자.
1000디르함 신권을 해부하다
일단 화폐 단위부터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5, 10, 50, 1000디르함 신권의 디자인이 공개됐다. 20, 100, 200, 500디르함의 디자인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 없다. 공개된 바를 차분히 따져보면 전반적인 논의의 방향을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UAE는 신권 디자인을 통해 일종의 '내셔널 스토리텔링'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5디르함에는 앞뒤로 아지만 요새(Ajman Fort)와 다야 요새(Dhayah Fort)가, 10디르함 지폐에는 셰이크 자이드 그랜드 모스크와 코르파칸 원형 극장이 그려져 있다. 아지만 요새에서는 알 샴시(Al Shamsi) 토후국이, 다야 요새에서는 알 콰시미(Al Qasimi) 토후국이, 과거에 나름의 이유로 전투를 벌였지만 진압 당했고 훗날 아부다비 토후국을 중심으로 하는 UAE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내부의 갈등과 투쟁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동질감을 다지는 일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셰이크 자이드 그랜드 모스크와 코르파간 원형 극장은 2007년, 2020년에 완공된 대형 종교, 문화 시설이다. 이러한 건축물을 새로운 지폐에 넣는 이유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UAE의 종교적, 문화적 자랑거리를 뽐내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인위적으로 노력한다고 한들 선지자 무함마드가 직접 점지한 땅, 사우디아라비아에 소재한 메카의 상징성을 넘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슬람 국가인 만큼 종교적 상징물을 앞세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 토대를 확인하고 나면 그 다음은 무엇일까. 당연히 '정치' 혹은 '건국 그 자체'의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그렇다. 50디르함 지폐의 앞면에는 7명의 건국자가 연합왕국을 만들기로 합의하는 장면이, 뒷면에는 그 합의서에 서명하는 자이드의 모습이 담겨 있다. 요컨대 UAE 중앙은행은 5, 10, 50디르함 신권을 통해 '국가의 탄생'을 그려낸 것이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지폐들을 넘어 오늘의 주제인 1000디르함 신권을 들여다보자. 우주왕복선은 UAE가 아니라 USA(미국)가 만든 것임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것이 UAE의 신권 도안에 등장할까. 자이드가 1976년에 미 항공우주국(NASA)에 방문하고 우주 개발에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UAE의 '내셔널 스토리텔링'에 따르면 그 관심은 헛되지 않았다. 2020년 7월 아랍권 국가 최초로 화상탐사선 '아말'(희망)을 발사하는데 성공했다. 우주왕복선 위로 그려진 사각형의 인공위성 같은 우주선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보안요소의 기능을 겸하고 있는 우주비행사의 모습 역시 우주개발 성과 중 하나다. 2021년 UAE는 두 명의 우주비행사 후보를 최종 선출해 30개월간의 훈련 프로그램에 돌입했다.
그 우주비행사 후보 중 한 명은 엔지니어 출신의 누라 알마트루시(29)라는 여성이다. 이 점만 놓고 보면 다른 아랍 국가들과 비교할 때 매우 선진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화폐에 그려진 우주비행사는 온 몸을 뒤덮는 우주복을 입고 있기에 그 신원은 고사하고 성별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UAE 중앙은행(CBUAE)의 보도자료에도 '어떤 우주비행사(a astronaut)'라고만 표기돼 있다. 말하자면 '슈뢰딩거의 여성 우주비행사'인 셈이다.
남의 나라 돈을 이렇게까지 길고 자세히 설명한 이유를 이제 독자 여러분도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다. UAE의 1000디르함 신권 지폐의 뒷면을 대한민국 원자력 발전소가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곱씹어 보기 위해서다.
앞서 우리가 추정한 바에 따르면 UAE의 신권 지폐 도안들은 UAE라는 연합 왕국의 기원부터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내셔널 스토리텔링'을 제시하고 있다. 서로 나뉘어 다투는 아랍의 작은 토후국들이었지만, 종교와 문화의 힘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협상을 통해 연합왕국을 꾸려, 결국 우주선을 쏘고 원자력 발전소를 짓는 장쾌한 이야기다.
부러운 美, 얄미운 日, 무서운 中
앞서 언급한 CBUAE의 보도자료를 보면 이러한 추측은 확신으로 기울어진다. 인용해 보자.
"중앙은행은 또한 아부다비 토후국에 위치한 바라카 원자력 발전소의 모습을 신권의 뒷면에 배치함으로써 UAE의 또 다른 국제적 성취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습니다. 발전소는 UAE의 에너지 공급원 다변화, 탄소 배출 저감, 그 목적을 향한 국제적 의무를 다하는데 UAE가 앞장설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핵심 역할을 수행할 것입니다."
바라카 원전을 건설하는 주체, 더 나아가 그 원전의 핵심 기술인 원자로를 개발한 주체는, 대한민국이다. UAE는 팀 코리아를 사업자로 선정하고 계약해 일거리를 주었을 따름이다. 그런데 UAE는 자신들이 개발하지도 않은 원전을 자국의 '과학승리'를 표상하는 기념물로 인식하고 그것을 최고액권 화폐에 그려 넣고 있다.
이는 순수하게 '국뽕'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엄청난 일이다. 월드컵에서 16강, 혹은 4강에 진출하는 것,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많이 따오는 것, 심지어는 봉준호 감독이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거나 '오징어 게임'이 미국 TV의 가장 큰 명예인 에미상을 수상한 것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일대 사건이다. 매년 혹은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대회에서 성취를 내고 상을 받는 것은 물론 자랑스러운 일이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매우 큰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나라의 지폐에 등장할 일인가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바라카 원전은 우리가 아는 그 모든 한류 수출을 합친 것보다 큰 사건이다.
앞서 던졌던 질문을 다시 한 번 꺼내들 수밖에 없다. 한국 언론은 왜 이 사안을 모두 단신 취급하고 지나갔던 걸까. 원자력 발전에 호의적이지 않은 진보진영뿐 아니라 문재인 정권의 탈원전에 대해 비판적인 보수 성향 언론들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 언론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국뽕'으로 소비될 수 있을만한 사안이면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드는데, 이번 경우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잠잠하고 침착하다. 무언가가 한 나라의 지폐에 등장한다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이해하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UAE는 미국처럼 우리가 동경하는 선진국이 아니라서 별로 중요한 뉴스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보고 있는 걸까.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인식하는 '외국'은 딱 셋이다. 부러운 미국, 얄미운 일본, 무서운 중국. 그 외의 국가들은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행동한다. 그러면서도 한국이 수출 강국이라는 둥 문화 대국이 되었다는 둥 '선진국 놀이'를 하고 있다. 우리의 의식은 여전히 이런 수준이다. 대한민국의 기술력으로 만들어낸 원자로 APR1400이 어떤 자원 부국의 '네셔널 스토리텔링'의 주인공 중 하나가 돼 그 나라의 지폐에 등장하는 경사가 벌어졌는데도 해외 토픽 취급해버린다. 과연 우리에게 선진국이 될 자격이 있는가.
독일이 '장작' 검색한 이유
지폐의 앞면과 뒷면을 뒤집듯, 'UAE 지폐에 한국 원전 출현'이라는 사건의 또 다른 면에 대해서도 논의해 보자. 2022~2023년을 잇는 겨울에 시작된 '조용한 에너지 전쟁', 그리고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위기와 원자력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다.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두 나라 사이에서 벌어지는 '반도체 전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대중적 이해가 쌓인 상태다.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반대로 중국은 미국의 공급망 차단을 뚫고, 혹은 자체 기술력을 통해 고도화된 반도체 생산을 해내고자 한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자동차뿐 아니라 오늘날 생산되는 거의 모든 고부가가치 상품에 반도체가 들어간다는 점을 놓고 볼 때, 미중 패권 전쟁의 일환으로 반도체 전쟁이 진행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변화는 따로 있다. 지금 우리는 물밑으로 조용히 벌어지는 에너지 전쟁을 목격하는 중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목격'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본격화된 에너지 전쟁의 여파를 우리는 아직 직격으로 맞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가스 가격이 급등해 '고지서 폭탄'을 맞았다는 사례가 종종 등장하고 있으나,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일은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찰과상'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독일이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다. 2022년 11월, 겨울을 앞둔 독일에서 갑자기 상승한 구글 검색어가 있었다. '장작'이었다. 가스비가 폭등하자 장작을 떼고 그 온기로 겨울을 나기 위해 독일인들이 검색을 시작한 것이다. 나무를 베어서 연료로 쓸수록 숲은 사라진다. 친환경과는 거리가 있다. 야심차게 '에너지 전환'을 추진하던 독일 정부와 국민들은 차가운 현실 앞에 몸서리치는 중이다.
생산량 기준으로 세계 8위의 산유국인 UAE가 전력 소비량의 25%를 충당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원자력 발전소 건설 사업에 나섰던 것은 바로 이런 현실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풍부한 석유와 돈을 가지고 있지만 매장량이 고갈되면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게다가 당장 석유가 다 떨어지지 않더라도, 국제 정세의 변화로 인해 석유의 생산, 가공, 공급 경로가 막힐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이는 국가 안보의 필수적 과제다. CBUAE의 보도자료에 "에너지 공급원 다변화"가 명시돼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최근 수십 년간 그 어느 때보다 에너지를 진지한 안보 문제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인 것이다.
고정관념, 무지, 오해
더욱 거시적이고 대승적인 차원의 논의로 넘어가 보자. 세계가 에너지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 지금, 기후변화라는 전지구적 과제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앞서 언급한 독일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머지 폐쇄하기로 했던 석탄화력 발전소의 수명을 연장시켰다. 심지어 영국에서는 30년 만에 처음으로 신규 석탄 광산의 개발을 승인한 상태다. 물론 영국 정부의 설명에 따르면 그 광산의 석탄은 발전용이 아니라 제철소에서 사용하는 점결탄이며, 생산량은 영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수출될 예정이다.하지만 우리는 분명한 추세를 확인할 수 있다.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장밋빛 전망과 부푼 기대가 온 세상을 휩쓸었던 지난 시절은 이미 끝났다. 단위 에너지 당 가장 많은 탄소를 배출하는 '더러운' 석탄에 각국이 손을 대고 있다. 최근 10여 년간 완전히 금기시됐던 'C 단어'(Coal)가 정책 결정자들의 입에 다시 오르내린다. 우리는 불과 몇 년 전과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게 된 것이다.
에너지는 안정적으로 꾸준하게 생산돼야 한다. 인간의 판단에 따라 생산량을 늘리거나 줄이고, 때로는 완전히 멈출 수도 있어야 한다. 안정적 에너지 공급원이 든든한 바탕을 이뤄야 산업 발전이 가능해진다. 그러한 기저발전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화석연료를 태우는 다양한 화력발전(석탄, 석유, 천연가스)과 수력, 그리고 원자력뿐이다. UAE의 자연적 여건을 고려해보면 수력은 선택지가 아니고 화력 아니면 원자력을 택해야 한다.
화석연료를 연소시키면 그 속에 들어 있는 탄소가 산소와 결합해 이산화탄소가 된다. 그 어떤 환경주의 운동도 바꿀 수 없는 물리 법칙이다. 반면 원자력 발전은 우라늄의 붕괴에서 나오는 열을 이용해 터빈을 돌리는 것인데, 우라늄이 쪼개지는 핵분열 반응에는 산소와 탄소가 관여하지 않는다. 탄소 배출량은 당연히 0이다. 탄소 배출을 줄이는 국제적 노력에 발맞추기 위해 원자력 발전소를 짓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 상식적인 판단은 놀랍게도 선진국일수록 통하지 않는다.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는 풍요에 익숙해진 시민들이 '녹색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며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하지도 인식하지도 않는 선진국 시민들은, 석탄화력이나 원자력처럼 '불쾌한 거대 괴물' 없이 태양광과 풍력 등으로 에너지 수요를 충당할 수 있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이미 국제정치라는 냉혹한 현실이 그 착각을 무참히 깨뜨렸지만, 한번 자리 잡은 대중의 인식이 바뀌려면 더 많은 시간과 큰 고통의 과정이 필요할 듯싶다.
바라카 원전 수출은 해당 기업들의 호재이며 대한민국의 큰 경사다. 그 원전이 UAE의 새 지폐 도안에 포함됐다는 것은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일이다. 하지만 개발도상국을 폄하하는 고정관념, 에너지 전쟁이 시작된 국제 정세에 대한 무지, 원자력 발전에 대한 오해 등이 복합된 결과,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이룬 성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는 100년을 더 발전해도 선진국이 될 수 없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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