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경성제대 축구팀, 英軍·큐슈제대를 꺾다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2. 12. 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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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조선인 학생으로만 구성…철학도 박치우가 왼쪽 공격수, 국어학도 방종현은 실질적 주장,
1930년10월22일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영국 해군 브리지워터 팀과의 대결에서 경성제대 축구부는 2대1로 이겼다. 조선인 학생들로 구성된 축구팀이었다. 경기 후 기념촬영에 나선 선수들./'다시 보는 경성제국대학'중

1930년10월 22일 오후 4시 경성운동장(옛 동대문운동장)에서 한·영 축구대결이 펼쳐졌다. 인천항에 입항한 영국 군함 ‘브리지워터’팀과의 친선경기였다. 우리 축구팀은 경성제대(이하 城大·성대) 축구부였다. 전원 조선인 재학생들로 이뤄진 아마추어 축구팀이었다. 중국에 배속된 ‘브리지워터’ 축구팀은 그해 20여차례 친선 경기에서 대부분 승리한 강팀이었다. 중국의 강호 난징대를 4:1로 누르기도 했다.

영국팀은 화려한 기량으로 경기를 주도했다. ‘영군(英軍)의 ‘롱킥’과 ‘숏킥’과 ‘헤-딍’은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성대군(城大軍) 압박을 당하면서도 전반전에는 일대일의균형(均衡)의 세(勢)로 진행(進行)하다가…'(‘城大 對 英艦 축구 城大 得勝’, 조선일보 1930년10월25일자)

경성제대 학우회보에 실린 지상(誌上) 중계에 따르면, 선제골은 경성제대가 넣었다. 시작 4분 만에 하프라인 왼쪽에서 드리블로 밀고 들어가 레프트 포워드 정경모에 패스, 득점한 것이다. 영군(英軍)은 전반 21분 코너킥을 이용한 헤딩으로 한 골을 만회했다.

후반전은 일진일퇴 공방전이었다. 종료 1분 전인 후반 34분에야 승부가 났다. 레프트 윙 노윤모의 강한 슛을 영군 골키퍼가 쓰러지면서 잘 잡았지만, 골라인 안쪽으로 밀려나 결승점을 허용했다. 경성제대의 2:1 승리였다.

경성제대 예과 4,5회로 구성된 축구팀. 왼쪽 아래에서 두 번째가 주전으로 뛴 박치우다. /'다시 보는 경성제국대학'

◇민족의식 자극한다며 文友會 해산

축구는 1920년대 조선의 최고 인기 스포츠였다.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이 강팀이었다. 경성제대 축구부는 1928년부터 활발하게 움직였다. 학교 내 서클활동부 16개중 조선인을 중심으로 모인 유일한 서클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학생들은 원래 ‘문우회’(文友會)를 중심으로 모였다. 문학서클같지만 예과에 다니는 조선인 학생 전체를 망라한 조선인 학생회였다. 문우회는 ‘본회는 조선 문예의 연구와 장려를 목적으로 하고 매학기 1회씩 조선문예잡지를 발간한다’는 회칙을 정했다. 이에 따라 우리말 잡지 문우(文友)를 발간했다. 유진오, 이효석, 고유섭, 조용만이 ‘문우’에 글을 발표했다. 하지만 1928년 11월 5회까지 발간하고 해산당했다. 학교당국이 6.10 만세운동 이후 조선 학생의 민족의식을 자극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주시하다 문우회를 해산시켰다.

영국 해군 브리지워터 팀과의 친선경기를 보도한 조선일보 1930년 10월25일자 기사

◇큐슈제대와의 한일戰

문우회 후신 격인 예과 축구부는 조선 학생들의 구심체가 됐다. 1928년 6월 일본 대학 축구 강호인 메이지대 축구팀이 경성운동장에서 성대(城大) 축구팀과 맞붙었는데, 성대가 2:0으로 의외의 승리를 거뒀다. 성대 축구팀은 1929년 가을 만주 순회 원정을 떠났다. 뤼순공대와 다롄 일반팀은 가볍게 눌렀으나 펑톈(현 선양)에서 맞붙은 만주의대에 졌다.

성대 축구부는 매년 큐슈제대와 정기전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한일전이 됐다. 1929년 경성에서 1차전을 가졌고, 다음해 2차전은 후쿠오카에서 열리는 식이었다. 1차전은 성대의 승리였고, 2차전 원정에서도 3경기를 겨뤄 2승1패로 이겼다. ‘큐슈제대와 대항식 축구전을 거행키 위하야 원정한 경성제대 축구부 선수 일행은 그간 삼회시합을 거행하야 제 1회전에는 1대0으로 성대가 득승하고 제2회전은 역시 1대0으로 큐슈대가 득승한 결과 25일 결승에는 1대0으로 성대가 쾌승하야 연2년 우승권을 장악하고 27일오전7시 경성역착 열차로 귀경할 터이라 한다.’(‘九洲에 원정한 城大우승’, 1930년9월27일)

큐슈제대와의 정기전은 1938년 제10회 대회 때까지는 개최됐다는 사실이 신문 보도를 통해 확인된다. 1934년 6회대회까지 경성제대의 무패행진이 이어진 사실로 미뤄, 경성제대팀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 것같다.

1930년 첫 번째 큐슈 원정 선수단 명단에서 눈길을 끄는 인물이 있다. 박치우(1909~?)다. 박치우는 이듬해 경성에서 열린 큐슈제대와의 경기에도 출전했는데 학부에 진학해서도 축구팀에서 계속 뛰었던 모양이다. 왼쪽 공격수(LF)였다. 서양철학을 전공한 박남철은 1933년 졸업 후 숭실전문 교수를 거쳐 1938년 조선일보 사회부와 학예부 기자로도 일했던 인텔리였다. 광복 후 월북한 박치우는 빨치산 정치교육을 맡은 강동정치학원 교수로 있다가 빨치산 부대 정치위원으로 내려와 오대산 부근에서 사살당했다고 한다.

◇국어학자 방종현이 실질적 축구부 회장

1930년 큐슈 원정 경기 때 매니저로 참가한 이흥배(1908~1994·국방차관, 경기지사 역임)는 경성제대 학우회보에 원정기를 생생하게 썼다. 그는 “조선 학생들이 따로 축구부를 하자고 논의한 것이 아닌데도 자연히 몰렸고 은연중 결속되었다”고 회고했다. 이흥배는 축구부의 실질적 주장 역할을 방종현(국어학자·1905~1952)이 했다고도 썼다. ‘방종현은 실질적인 축구부 회장 격이었다. 무슨 일이나 열성인 그였지만 축구를 직접 하지 않아도 축구부 일이라면 으레 앞장을 섰다’는 것이다. 방종현은 박치우와 같은 해인 1928년 경성제대 예과 5회로 입학한 동기생이다. 박치우와 같은 1938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향토문화조사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다. 일제시대 거의 유일하게 방언을 수집, 연구해 1940년 ‘속담대사전’을 펴냈다. 광복후 서울대 문리대 학장을 지냈다.

◇일본인 학생과의 갈등

조선인 예과생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축구부를 둘러싸고 한일 학생 간의 갈등도 있었다. 일본인이 4분의3가까이 차지한 경성제대 예과 학생회에서 조선 학생으로 이뤄진 축구부의 여름 원정 예산을 삭감해버렸기 때문이다.

‘경성제대 예과학생회 내 조선인 생도와 일본인 생도간에 여러 가지 문제로 항상 알력이 있어 오던 바 금번 동학생회 주최인 각 운동부 하기원정에 대하여 전부 조선인 학생으로 부원이 되어 있는 축구부에는 원정시키지 않고자 일인(日人) 생도가 반대하여 오던 중 학생회 총무와 직원회에서 여러가지 사정을 고려한 결과 동(同)축구부의 원정 참가를 가능케 할 일인일표제(1人1票制)를 제안하였으나 일인 학생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야 작일(昨日) 생도총회에서 일인일표안의 취소를 강박하였음으로 동학생위원회에서(위원 대부분은 일인생도)는 강경하게 주장을 못하게 되자 참석하였던 조선인 생도 백명은 다수를 믿고 횡포를 자행하는 일인 학생과 일인만으로 조직된 위원회의 무성의함을 분개하야 규탄적 격론을 한 후 일제히 퇴장하였는데 일년에 15원씩 다 같이 운동회비를 내면서 일인학생들만으로 부원이된 유도 검도부에만 대부(?)를 지출하며 축구원정단 참가에 대하야 노골적으로 방해함은 부당천만한 일임으로 퇴장한 조선인 학생 일동은 결속하야 학생회와 일인 생도에게 항쟁하리라 한다.’( ‘城大 학생회에서 朝日학생 알력’, 조선일보 1930년 6월22일)

카타르 월드컵 16강에 진출한 한국 축구의 저력 어딘가엔 일본인의 차별과 맞서 싸우던 90년 전 청년들의 기개가 맞닿아있을 지도 모르겠다.

◇참고자료

이충우, 최종고, ‘다시 보는 경성제국대학’, 푸른 사상,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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