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서 만난 김보름‧노선영…판사가 '손흥민' 언급하며 한 말 [法ON]

오효정 입력 2022. 12. 10. 05:00 수정 2022. 12. 10.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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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름, 박지우 선수의 자격 박탈과 적폐 빙상연맹의 엄중 처벌을 청원합니다”

지난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팀 추월 준준결승전에서 노선영이 뒤처지며 결승선을 통과하자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게시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팀 추월 준준결승이 끝난 후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게시글 제목입니다. 경기 후반 노선영(33·은퇴)이 뒤처졌는데도 김보름(29·강원도청)과 박지우(24·강원도청)가 의도적으로 가속해 먼저 결승선을 넘었다는 ‘왕따 주행’ 논란이 생겨났죠. 여자 팀추월은 각각 3명으로 구성된 두 팀이 링크 반대편에서 동시에 출발해 6바퀴를 질주하는 종목입니다. 세 선수가 자리를 바꿔가며 주행하는데, 맨 마지막 주자가 결승선을 통과하는 기록으로 순위가 결정됩니다.

당시 김보름은 ‘왕따 주행’의 주동자로 지목받아 비난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노선영이 경기 전후에 한 인터뷰도 관심을 받았습니다. “성적이 좋은 선수들만 한국체육대학교에서 별도로 훈련하고 있다” “한 번도 연습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경기를 치렀다”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감사 결과 ‘왕따 주행’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고, 김씨의 반격이 시작됐습니다. 2020년에 노씨를 상대로 2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낸 겁니다. 허위 인터뷰로 명예를 훼손했을 뿐 아니라, 그동안 노씨가 폭언을 일삼았다는 내용 역시 포함됐습니다.

법적 다툼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지난 2월 1심 재판부는 노씨의 일부 폭언 사실을 인정해 300만원의 배상 책임이 있다고 봤습니다. 양측은 항소했고, 9일 서울고등법원 민사13부(부장 강민구) 심리로 열린 2심 마지막 변론 기일에는 두 선수가 직접 법정에 나와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앞서 재판부가 “원고와 피고를 모두 법정에 세우고 국회 청문회와 같은 방식으로 당사자 신문을 하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18년 2월 강릉 스피드스케이트장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팀추월 7-8위전에 출전한 박지우(왼쪽부터), 노선영, 김보름이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폭언한 적 없다” vs “훈련일지·선수들 증언 있다”

김씨는 “노씨가 2010년부터 2018년 평창올림픽 때까지 수차례 고성과 폭언, 욕설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둘은 한국체육대학교 선후배 사이입니다.

2017년도 11월과 12월에 적힌 김씨의 훈련일지에는 “노선영이 욕을 하면서 시비를 걸었다”는 내용이 세 번 정도 등장합니다. 김씨는 이날 “2017년 2월 삿포로 아시안게임 기간에 식당에서 노씨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욕을 들었다”라고도 말했습니다. 김씨 측은 다른 선수들의 사실확인서 역시 대거 제출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이를 근거로 노씨가 폭언과 욕설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는데, 노씨는 “그런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습니다. 노씨는 “훈련 때 시간에 맞춰 타야 하니 ‘빠르다’, ‘느리다’를 알려준 것이지 욕을 한 적은 없다”고 반복해 말했습니다. 다른 선수들이 낸 사실확인서 역시 신빙성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고 반박했습니다.


“허위 인터뷰로 명예훼손” vs “빙상연맹 지적했을 뿐”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노선영(왼쪽) 선수와 김보름 선수. 노씨는 올림픽 전후 언론 인터뷰에서 "연맹이 메달 만들기에 급급하여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 "다른 선수들과 만날 기회가 없었고 팀 분위기가 좋지 않아 제대로 훈련하지 못했다"는 취지로 밝혔다.


노씨가 평창올림픽 전후에 한 언론 인터뷰에 대해 1심 재판부는 ‘표현의 자유’ 영역으로 보고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는데요. 이날 노씨는 “인터뷰를 통해 빙상연맹의 부당한 부분을 지적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씨에 대해 명예훼손을 할 의도가 없었다는 취지입니다.

반면 김씨 측은 “노씨가 밖에서는 ‘저격 인터뷰’를 하면서도 정작 ‘왕따 주행’ 논란에 대해 제대로 해명한 적이 없다”고 지적합니다. 팀 추월에서는 통상 뒤처진 선수가 소리를 질러 앞 선수들에게 신호를 주어야 한다고 하는데요. 당시 노씨는 순간적으로 격차가 벌어지는 바람에 신호를 미처 주지 못했다고 합니다. 나머지 두 선수가 노씨를 따돌린 것이 아니라, 뒤에서 벌어진 상황을 정확히 몰랐던 거죠.

▶김씨 측 변호인 “동생들이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는데도, 경기 당시 본인이 신호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동생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경주를 마친 사실을 왜 뒤늦게라도 밝히지 않았습니까?”

▶노씨 “저도 그 경기로 상처와 충격을 받았습니다. 경기 끝나고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다음날 감독님이 기자회견에서 노선영이 원했던 순서로 탔기 때문이라고 저한테 뒤집어씌우는 것을 보고 굉장히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서서 말할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경기 당일 워밍업 과정에서 주자 순서가 바뀐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점, 김씨가 경기 직후 “마지막에 격차가 벌어져 기록이 아쉽다”는 취지로 인터뷰해 상처를 받은 점 등도 언급했습니다.


재판부 ‘화해 작전’에 손흥민 등장한 이유

재판부는 이날 변론을 마무리하며 내년 1월 13일을 선고 기일로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양측이 조금씩 양보해 조정으로 마무리할 생각은 없는지 물었습니다. 2심 판결이 나오면 누군가는 상고해 대법원까지 싸움이 이어질텐데, 시간이 길어질수록 당사자들에게 상처만 더 남는다는 겁니다.

▶재판장 “대법원에 간 민사 사건이 3년 갈지 5년 갈지 아무도 모르는데 두 선수는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 지옥 같은 몇 년을 보내야 합니다. 은퇴한 피고(노선영), 선수 생활하는 원고(김보름), 어린 두 사람을 대한민국 사회가 희생시키는 건 너무나 가혹해요. 어른들이 이런 선수들을 지옥에 몰아넣어도 되는가 하는 것을 우리 사회에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이 싸움의 원인이 된 빙상연맹과 ‘어른들’은 빠져있는 상황을 지적했습니다. 두 선수 사이 감정의 골이 이전부터 깊었는데도 코치진이 원만하게 해결하지 않은 것에 이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본 겁니다. 재판장인 강 부장판사는 “당일 워밍업할 때 주자 순서를 바꾸는 것을 (코치진은) 지켜만 봤느냐”라고도 했습니다. 이 사건이 우리나라 엘리트 체육의 성과 지상주의 풍토에서 비롯된 문제라고도 지적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법정에 손흥민 선수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했죠.

▶재판장 “운동선수들이 연습하는 게 공부의 1000배, 10000배 힘들다고 저는 봐요. 외국에서는 즐기면서 메달 따는데 우리나라는 올림픽 금메달을 따야 영웅이고 노메달이면 역적이고. 축구도 무조건 16강, 8강, 4강 가야 하고. 손흥민이 얼마나 불쌍한가요. 얼굴을 치료해야 하는데. 저는 눈물이 나요. 제 아들이라면 축구고 뭐고 다 때려치우라고 하겠어요.”

두 선수에 대한 ‘화해 작전’은 법정 밖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재판이 끝난 뒤 법정 직원이 “서로 눈이라도 맞추고 가라”며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해보려고 한 건데요. ‘눈 맞춤’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 멀리 온 걸까요. 서로 거리를 두고 법원에 잠시 머무르던 두 선수와 변호인들은 결국 어색한 듯 따로 법원을 떠났습니다. 재판부는 판결 전에 특별조정기일을 정할지 상의하겠다고 했습니다.

오효정 기자 oh.hyo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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