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과 소통 이루는 3억 몸값 명품 ‘착한 피아노’

유주현 입력 2022. 12. 10. 00:57 수정 2022. 12. 13.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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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기부하는 피아노’ 첫 탄생
지난달 29일,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북한강을 바라보는 산자락 끝에 새로 지어진 아담한 공연장 ‘명선아트홀’에서 독특한 행사가 열렸다. 요즘 몸값이 3억원이 넘는 최고급 그랜드피아노 ‘스타인웨이’ 함부르크 D-274 모델의 언박싱 행사였다.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 같은 대형 공연장에서 멀찍이 구경할 수 있는 피아노가 시골의 작은 홀에 터를 잡은 건 드문 경우다. 더욱 특별한 건 최초의 ‘기부하는 피아노’가 탄생한 날이기 때문이다.

일련번호 ‘618018’이라는 명찰이 붙은 이 피아노는 이날 ‘명선 1호’라는 이름을 갖고 세상에 나왔다. 피아노에 이름을 지어주고 ‘착한 피아노’로 인격화해 ‘아버지’를 자처하고 나선 건 (주)태인의 이상현 대표다. LS그룹 3세 경영인으로,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다. 2년 전 『대한민국 기부 가이드북』이라는 책을 내고 주변에 기부를 권하는 사람인데, 이제 피아노에게까지 기부를 시키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눔 실천 어머니 호 따와 ‘명선’

이진상 한예종 교수가 함부르크에서 직접 골라온 ‘명선 1호’를 연주하고 있다. 뒷쪽은 ‘명선 2호’. [사진 명선아트홀]
“‘명선(明善)’이란 이름은 어머니께 제가 지어드린 호인데 ‘밝은 마음으로 베푼다’는 뜻이에요. 음악을 사랑하시는 어머니는 지금도 매일 경비 아저씨께 간식 도시락을 손수 싸드릴 정도로 평생 베풂을 실천해 오신 분이거든요. 그 태도를 이어가고 싶어 공연장과 피아노에 어머니의 호를 딴 이름을 지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설계한 민현준 홍익대 교수의 설계로 최근 완공된 명선아트홀은 자연과 호흡하는 공연장이다. 북한강변을 따라 차를 달려, 고요한 산사를 찾아가듯 낙엽을 밟으며 잉어떼 노니는 연못을 지나면 아담한 2층 건물이 드러난다. 외벽은 노출 콘크리트에 삼나무를 덧대어 마치 목조건물처럼 자연의 느낌을 살렸고, 내부는 마룻바닥을 깔아 따뜻하고 편안한 가정집 분위기다. 특이하게 바닥에 면한 부분에 낮고 긴 유리창을 뚫어 외부 풍경을 끌어들였는데, 연주 분위기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관객의 시선에 숨통을 틔워주는 배려의 창문이란다. 이런 공연장을 본 적 있었나 싶게, 위치부터 구조까지 예사롭지 않다.

명선아트홀을 지은 이상현 (주)태인 대표 [사진 명선아트홀]
“대형 공연장에서 세계적인 공연도 많이 봤지만, 관객이 주인공이라기보다 연주회를 위한 구성품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어요. 자연과 어우러지는 공연장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연주회를 꿈꾸게 된 이유죠. 보통 공연장에서 연주에 집중하다가도 순간적으로 지루해지곤 하잖아요. 그럴 때 천장만 쳐다볼 게 아니라 잠시 잔디와 낙엽을 바라보며 한숨 돌릴 수 있도록 창밖 공간까지 연주장의 일부로 이용했습니다.”

명선아트홀은 이름처럼 ‘나눔의 공간’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대관 등으로 생기는 수익 일부를 소외된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연주홀에서의 연습기회와 실전무대 경험도 제공할 계획이란다. 내년 봄 예정인 개관 공연 때는 ‘명선 1호’가 ‘착한 물건 1호’ 겸 ‘착한 악기 1호’로 데뷔한다. ‘착한 물건’ ‘착한 악기’란 이상현 대표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함께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로 물건을 인격화시켜 기부의 주체로 삼는 개념이다. 자동차, 악기, 셰프의 칼 등 물건이 벌어들이는 수익으로 기부를 한다는 새로운 컨셉트다. ‘명선 1호’는 명선아트홀 대관 또는 외부 대여사업 등을 통한 수익 일부를 기부하게 된다.

자연 풍광을 즐기며 연주할 수 있는 ‘명선 1호’. [사진 명선아트홀]
이 대표는 이 피아노 언박싱 데이를 “명선 1호가 태어난 날로 기념하겠다”면서 진짜 딸을 낳은 아버지처럼 한껏 들떠 있었다. 독일에서 피아노를 직접 골라온 이진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와 피아노 전공생들을 초대해 기록용으로 첫 연주 영상을 촬영하기도 했다.

사실 이날 ‘출산’까지 산고가 길었다. 공급망 위기 탓에 명선아트홀 완공이 지연됐고, 명선 1호는 1년간 한국 총판인 코스모스악기 천안 창고 안에서 웅크린채 시간을 보냈다. 명선아트홀까지 이동을 위해 4톤 트럭이 동원됐고, 충격 방지 센서가 부착된 거대한 나무 박스에 3명의 운반 장인들이 산파처럼 달라붙어 조심조심 출산을 도왔다. 총중량 770㎏의 나무 박스에서 폭 156㎝, 높이 110㎝, 길이 274㎝의 480kg짜리 우량아가 마침내 위용을 드러냈다. 스타인웨이 피아노 운반에 도가 튼 사람들이었지만, 본체를 똑바로 세운 상태에서 다리를 조립하는 데만 30분쯤 걸렸다.

피아노 울림통 커 좋은 소리 내

총중량 770㎏의 ‘명선 1호’ 박스가 명선아트홀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 명선아트홀]
피아노가 홀로 서자 이 대표는 감격한 눈치다. 지금도 레슨을 받고 있다면서 잠시 현란한 건반 테크닉을 구사하더니 “역시 손맛이 다르다. 터치가 좋으니 집에 있는 피아노로는 잘 안되던 테크닉이 잘 되는 느낌”이라며 흐뭇해했다. 그는 요즘 모차르트 협주곡을 치고 있을 정도의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인데 “클래식 애호가일 뿐이지만, 직접 연주할 때 복잡한 세상사를 잠시 잊고 집중하게 되는 것이 좋아서 꾸준히 레슨을 받고 있다”고 했다.

조율사인 코스모스악기 김종태 과장에 따르면 새 피아노는 3일 정도 출퇴근을 하며 손을 봐야 한단다. 첫날은 음의 높낮이를 맞추고, 둘째 날은 건반 터치, 셋째 날은 음색을 손보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제맛을 낼 거란다. “아직은 대기업에서 찍어낸 설렁탕일 뿐, 40년 노포의 구수한 맛을 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스타인웨이 공장까지 가서 ‘명선 1호’를 점지한 이진상 교수도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황제’의 감미로운 솔로 파트를 연주하며 상태를 점검했다. 그는 “아직 조율 전이지만 홀의 층고가 높고 잘 울리게 설계돼 있어 좋은 소리가 날 것 같다”면서 “연주자들이 선호하는 공간과 피아노가 될 것 같다”고 했다.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아무나 함부르크에서 고를 수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상현 대표는 본인 취향보다 전문가 관점에서 최상의 피아노를 고르기 위해 지인인 이 교수에게 특별한 부탁을 했다. 이 교수는 10여년 전 독일 활동 시절 3년간 스타인웨이 공장에 취직해 조율사를 겸직했던 인연으로 직접 공장에 방문해 피아노를 골라올 수 있었다.

“마침 함부르크 연주 일정이 있어서 겸사겸사 갔죠. 똑같은 모델 7대 중에서 고를 수 있었는데, 사실 이건 준비된 게 아니었어요. 그 중에는 마음에 드는 게 없어 못 고르겠다 싶은 찰나, 구석에 마무리 세팅이 덜 된 피아노가 눈에 띄더군요. 그냥 한번 쳐봤는데 마치 보물을 발견한 느낌이었죠. 제가 스타인웨이에 있을 때 제작과정을 전수해 주셨던 스승을 모셔와서 뭘 골랐을지 맞춰 보라고 했더니 다행히 저와 마음이 딱 통했어요. 그래서 더 자신있게 고를 수 있었습니다.”

‘명선 1호’가 보물인 이유는 ‘목소리가 좋아서’다. 피아니스트에게 피아노의 상태란 성악가의 목소리와 같고, 목소리에 중요한 건 ‘파워’라는 게 이 교수의 말이다. “파워라는 게 소리가 크다는 뜻이 아니예요. 울림통이 크고 열려있어야 하죠. 그릇이 커야 소리가 은은하게 더 길고 멀리 가면서 몸 전체를 감싸는 느낌이 들거든요. 울림통이 큰 피아노는 오늘 소리가 거칠더라도 조율을 통해 맞출 수 있지만, 울림통이 작으면 아무리 쉽게 잘 쳐지더라도 좋은 소리를 낼 수 없죠.”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쌍둥이의 존재다. ‘명선 1호’보다 며칠 먼저 이 홀에 도착한 ‘명선 2호’ 얘기다. 같은 함부르크 D-274모델이지만 4년 정도 독일 공연장에서 사용됐던 중고 피아노다. 이상현 대표는 “친자식인 명선 1호가 ‘기부하는 착한 피아노’가 되기 위해 대여 사업을 할 예정이라, 대여 기간 동안 홀을 지키기 위해 명선 2호를 입양했다”고 표현했다.

“좋은 피아노가 없는 지역의 작은 홀에서 악기 컨디션 때문에 연주자가 진가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아쉽지 않나요. ‘착한 피아노’라는 이름에 걸맞게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입시나 콩쿠르를 앞두고 좋은 피아노를 경험할 수 있게 하고 싶어요. 일단 두 대의 피아노를 확보했으니 아마추어 투피아노 콩쿠르를 열고 싶은 것도 소박한 꿈입니다. 아빠와 딸이 투피아노 콩쿠르를 준비하면서 소통하며 음악을 만들어간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명선아트홀과 명선 1·2호를 통해 그런 나눔과 소통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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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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