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끈기의 잔혹사…"알리가 물러날 때 알았다면 말년은 달랐을 것"

임근호 입력 2022. 12. 9. 18:45 수정 2022. 12. 23.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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큇(Quit)
애니 듀크 지음 / 고현석 옮김
세종서적 / 444쪽│2만1000원
행동과학 전문가의 '중단의 기술'
알리, 은퇴 조언 무시하고 출전 강행
'불굴의 도전' 알렸지만 불운한 말로
"적절한 때에 관두는 전략 세워야"
산악인은 '복귀 시간' 정하고 출발
미군도 작전 중단 기준 명확히 수립
"인간은 낙관적 전망에 끌려
매몰비용 포기하는 법 알아야"

32세 ‘노장’ 무하마드 알리가 1974년 프로복싱 헤비급 세계 챔피언 자리를 되찾았다. 1967년 베트남전 징병을 거부해 챔피언 지위를 박탈당하고 7년 만이었다. 상대는 자신보다 일곱 살 어린 조지 포먼. 그전까지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선수였다. ‘정글의 혈전’이라고 불리는 이 경기로 알리는 포기를 모르는 ‘끈기의 상징’이 됐다.

알리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 경기 후 알리의 육체적·정신적 퇴화가 시작됐다는 신호는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가까운 사람들까지 “이제는 은퇴할 때”라고 말렸다. 알리는 고집을 부렸다. 1981년까지도 시합을 이어 나갔다. 결국 1984년 그는 파킨슨병을 진단받았고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행동과학 전문가인 애니 듀크가 쓴 <큇>은 “끈기로 버티는 것만이 항상 최선은 아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스포츠부터 정부 정책, 기업까지 다양한 사례를 담고 있으며, 심리학과 행동경제학 등 과학적인 틀로 사람들이 그만두기를 주저하는 이유를 탐구한다. 저자는 컬럼비아대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프로 포커판에서 여성 플레이어로서는 역사상 가장 많은 상금을 딴 기록을 갖고 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역경을 극복한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책과 영화,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사람들에게 “쉽게 포기하지 말 것”을 권한다. 반면 적절한 때에 그만둔 사람들의 이야기는 잘 다뤄지지 않는다. 1996년 에베레스트 등반에 나선 스튜어트 허치슨, 존 태스크, 루 카시슈케 등 3명이 그런 예다.

위험한 등반을 하는 산악인들에겐 ‘복귀 시간’이라는 꼭 지켜야 할 기준이 있다. 목표 지점에 정해진 시간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하산해야 하는 규칙이다. 그날 에베레스트 정상의 복귀 시간은 오후 1시였다. 그런데 한 줄로 가야 하는 길에 여러 등반팀이 몰리면서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허치슨 등이 포함된 등반팀도 처음엔 주저했다. 이번에 포기하면 1년 뒤에나 다시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오전 11시30분께 하산을 결정해 무사히 내려왔다.

세계적 등반가인 롭 홀이 이끄는 등반팀은 포기하지 않았고 오후 2시께 정상에 올랐다. 게다가 등반팀 중 가장 속도가 느렸던 더그 핸슨은 오후 4시가 돼서야 정상에 도착했다. 핸슨과 핸슨을 끝까지 기다린 홀은 결국 산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2015년에 영화 <에베레스트>로 만들어졌다.

이런 사례는 수없이 많다. 떨어지는 주식을 끝까지 들고 있는 투자자, 산업이 사양길에 들어선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사업을 고수하는 경영자, 적자가 불가피한데 이미 공사를 시작했다는 이유로 계속 추진하는 정부의 공공사업 등이다.

쉽게 포기하지 말 것을 장려하는 문화 탓이기도 하지만 인간 심리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은 현 상황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부정적 전망보다는 낙관적 전망에 더 끌린다. 경제학에선 회수할 수 없는 매몰 비용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고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지만, 손실을 확정해야 하는 선택엔 여전히 손이 잘 가지 않는다.

따라서 단순히 의지에 기댈 게 아니라 잘 그만두기를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 산악인들의 복귀 시간처럼 중단 기준을 마련해두는 게 그런 방법의 하나다.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하기 위한 넵튠 스피어 작전에서 윌리엄 맥레이븐 장군은 크게 두 가지 기준을 세웠다. 첫 번째는 미리 정한 스케줄에서 1시간 이상 지체되면 작전을 중단할 것, 두 번째는 작전 대원들이 빈 라덴의 은신처에 도착하는 데 걸릴 것으로 예상한 시간의 절반이 지나지 않았을 때 파키스탄 정부군에 발각되면 철수할 것이었다.

‘원숭이와 받침대’라는 기준도 있다. 세상을 바꿀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는 알파벳 자회사 ‘엑스(X)’에서 쓰는 방법이다. “원숭이가 공원에서 받침대 위에 앉아 횃불로 저글링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상황을 가정해보자”는 것이다. 받침대 만드는 건 쉽지만, 원숭이가 저글링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많은 프로젝트가 쉽게 할 수 있는 부분부터 시작한다. 나중엔 어려운 부분에 막혀도 그동안 시간과 돈, 노력을 들인 탓에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따라서 프로젝트는 어려운 부분부터 시작해야 한다.

월드컵이 끝나고 ‘꺾이지 않는 마음’이 강조되는 이때 이 책은 우리에게 또 다른 측면에서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미국 유명 컨트리 가수 케니 로저스는 ‘갬블러’란 노래에서 이렇게 말했다. “언제 계속해야 할지, 언제 접어야 할지, 언제 떠나야 할지, 언제 도망쳐야 할지 알아야 한다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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