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아시아계 미국인·노벨상 수상자’ 레사···거대 권력과 싸워온 저널리스트의 고백[책과 삶]

오경민 기자 2022. 12. 9.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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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현실을 어떻게 조작하는가
마리아 레사 지음·김영선 옮김 | 북하우스 | 456쪽 | 1만8500원
202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필리핀의 마리아 레사. AFP연합뉴스

지난해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러시아 저널리스트 드미트리 무라토프와 함께 필리핀 저널리스트 마리아 레사를 호명했다. 노벨위원회는 레사를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두려움을 모르는 옹호자”라고 표현했다. 레사는 필리핀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였지만 노벨상 발표 후 며칠이 지나도록 대통령궁은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레사가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맞서온 대상이 바로 필리핀 권위주의 정부이기 때문이다. 대통령궁 출입을 금지당한 레사는 명예훼손 등 10여건의 혐의로 피소됐으며, 그에게 구형된 형량만 100년이 넘는다. 수상 소식을 전해받은 레사는 “평생을 감옥에서 살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민주주의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일생을 담은 자서전이 나왔다.

1963년 필리핀에서 태어난 레사는 일찍이 어머니와 미국으로 건너갔다. 유년 시절 그는 ‘파자마 파티’에 갔다가 깨달았다. “모험을 할 때는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 거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내 차례가 되면 내가 다른 사람을 도울 것이다. 두려움으로부터 달아나기보다는 두려움에 맞서는 게 낫다.” 그리고 이 믿음은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그는 두려움에 지지 않고 도전했다. 그는 CNN 마닐라 지국과 자카르타 지국을 이끌었다. 쿠데타 시도가 계속되는 필리핀, 인종·종교 간 갈등이 폭력적으로 분출한 인도네시아, 내전 중인 동티모르 등에 가 현장을 지켰다. 종군기자가 돼 전쟁 참상을 보도하기도 했다. 9·11테러 이후에는 고국으로 돌아가 필리핀 내 알카에다 조직의 연관성을 밝혔다. 이후 2005년 필리핀의 ABS-CBN 방송국에 합류했다. 그는 후원 중심으로 돌아가던 뉴스 조직이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출 수 있도록 미디어 환경을 조성했다.

2012년에는 탐사 저널리즘 매체인 ‘래플러’를 설립했다. 래플러는 두테르테 정권이 벌이던 ‘마약과의 전쟁’의 이면을 조명했다. 마약과의 전쟁은 민간인에 대한 초법적 살인이나 다름없었다는 점을 드러냈다. 그러나 관련 보도를 할 때마다 댓글 공격이 이어졌다. 레사는 페이스북을 비롯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내용의 ‘인터넷의 무기화’ 기사를 연속 보도했다. 인구의 97%가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필리핀에서는 가짜 계정을 만드는 ‘계정 농장’이 생겨났고, ‘좋아요’와 팔로어를 파는 회사도 횡행했다. 정부는 이를 이용했다.

책은 그의 일대기를 시간 순으로 다루며 그가 깨닫고 실천해온 저널리즘 윤리를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은 ‘객관성’이 언론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믿지만 레사는 “객관적인 언론인 같은 건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나는 언제나 ‘객관적’이라는 말 대신 ‘좋은’이라는 말을 수식어로 쓴다”며 “좋은 언론인은 균형을 찾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지도자가 전쟁 범죄를 저지르거나 시민들에게 노골적인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도 균형을 찾는다면 그것은 거짓 등가성의 오류로 귀결될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언론인이 권력자를 대할 때 ‘균형 잡힌’ 방식으로 기사를 쓰는 게 더 쉽고 안전하다. 하지만 이는 비겁한 사람의 탈출구일 뿐”이라며 “좋은 언론인은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사람들과 기후변화를 연구하는 과학자에게 똑같은 시간과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거대 권력과 싸워온 자세를 보여준다.

그는 최근 SNS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도 시장의 키를 쥐고 있는 SNS가 뉴스 소비를 망치고 가짜뉴스를 양산한다는 것이다. 그는 언론기업에는 있는 ‘게이트 키핑’ 기능을 SNS가 수행하지 않으면서 뉴스 생태계가 망가졌다고 말한다. 거대 플랫폼이 이를 방치한 채 분노와 혐오 같은 부정적 감정만 자극하는 가짜뉴스를 머물게 한다는 것이다. 지난 9월 한국을 방문한 그는 “SNS의 폐해로 세계의 민주주의가 50년 전으로 후퇴했다”며 “빅테크 기업은 분노와 혐오가 점철된 거짓말을 유통한다. SNS는 좋은 저널리즘에 대해 보상하지 않고 쓰레기에 대해서 보상을 준다”고 말했다.

레사는 퀴어이자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있지만 그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삶에 투신한 듯하다. 그의 개인적 고민은 책 초반부에 짧게 언급되는 데 그친다. 그는 언론인의 사명을 위해 사적인 삶의 일부를 희생했음을 고백한다. 그는 “나의 일이 곧 나의 삶이고 나의 삶이 곧 나의 일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지 알았다”며 “나는 이 결정을 계속해서 의식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었고, 지금 겪고 있는 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택한 삶에 만족하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의 단단한 마음이 책 전반에서 느껴진다.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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