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의 책과 지성] 사랑에 실패하면 폐인 아니면 시인이 된다 루 살로메라는 뮤즈와 이별 후 시를 얻은 릴케
이별은 흔적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우리는 떠난 사람이 남긴 흔적을 보며 가슴을 두드린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게는 살로메라는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여인이 있었다.
세기말의 우울이 유럽을 휩싸고 있던 1897년 5월 어느 날 뮌헨. 릴케는 소설가 야코프 바서만의 집에서 작가이자 정신분석학자인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를 만난다. 릴케는 열네 살 연상의 유부녀 살로메를 처음 본 순간 이 사랑의 폭풍이 평생 자신을 따라다닐 것임을 직감한다.
실제로 릴케는 이때 살로메에게 "우리는 어느 별에서 내려와 이제야 만난 거죠"라고 말했다고 한다. 살로메는 당대 최고 지식인이자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muse)'였다. 철학자 니체, 심리학자 프로이트 같은 천재들이 살로메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다.
살로메는 서서히 심약한 릴케의 영혼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릴케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르네'라는 프랑스식 이름을 독일식 '라이너'로 바꿨고, 글씨체까지 살로메의 글씨를 흉내 냈다.
흥미로운 사실은 릴케가 이때부터 시다운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랑은 그의 창조적 직관에 불을 질러 시를 쓰게 했다. 살로메를 만나기 전 릴케는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대표작을 쓰지는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릴케 하면 떠올리는 대표적인 연시들은 대부분 살로메를 만난 이후 창작된 것이다. 살로메가 그의 시세계를 완성시킨 셈이다. 살로메는 릴케에게 명실상부한 뮤즈였다.
하지만 릴케는 시를 얻은 대신 사랑을 얻지는 못했다. 다음 시를 보자.
"이별이란 어떤 것일까/내가 아는 이별, 어두운/매정한 어떤 것. 아름다웠던 것을/다시 한번 보여주면서, 질질 끌며/찢어버리는 어떤 것/어떻게 아무 방어 없이/그곳에 나를 부르고, 가게 하고, 남게 하는/그것을 쳐다볼 수 있었던가."
'이별'이라는 제목의 시다. 이 시는 그가 이름과 필체를 남겨준 치명적인 여인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얼마나 헤매었는지를 보여준다. 살로메는 릴케에게 어떤 확신도 주지 않았고, 끊임없이 이별을 암시하면서 릴케를 힘들게 했다.
릴케는 시달렸다. '질질 끌면서 마음을 찢는 듯한' 그 사랑을 심하게 앓았다. 더욱 잔인한 건 '아름다웠던 것을/다시 한번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랑에 실패하면 '폐인'이 되거나 '시인'이 된다는 우스개가 있다. 릴케는 사랑을 잃고 시인이 된 경우다.
릴케는 아팠지만 우리는 릴케를 기억한다. 사랑을 갖지 못했으며, 그로 인해 공허하고 외로운 삶을 살았던 남자. 하지만 그 대가로 위대한 시를 남긴 남자.
신은 릴케에게 사랑을 주는 대신 시를 줬다.
[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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