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터부터 관람객의 몸까지 … 그의 손에선 조각이 된다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2. 12. 9.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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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출신 '스타 조각가' 에르빈 부름 개인전
1 수원시립미술관에 전시된 '사순절 천'(2020). 2 수원시립미술관에 전시된 '팻 컨버터블: 팻 카'(2019). 3 '1분 조각 시리즈'의 지시 드로잉.

조각은 바라보는 자와 바라보이는 대상 사이의 긴장관계에서 형성되는 미술이다. 여기서 문제. 바라보는 자가 바라보이는 대상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 긴장은 전에 없던 새로운 장르가 되지 않을까. 주체가 대상이 되고 대상이 주체가 되면서 바라보는 자의 자리가 어느덧 지워지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작가 에르빈 부름은 조각의 경계를 확장하는 실험을 해왔다. 그의 작품에선 주체와 대상이 역전되고 치환된다.

전시실 관람객이나 작가 자신을 조각의 요소로 설정하거나, 조각의 기본 요건인 부피를 왜곡해 실존의 경계를 뒤흔들거나, 심지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비가시적인 시간마저 조각의 요소로 장치하는 부름의 과감성은 그에게 '스타 조각가'라는 명성을 안겼다.

이달 7일 개막한 에르빈 부름의 전시가 내년 3월 19일까지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열린다. 전시장을 찾은 부름과 함께 지난 6일 그의 작품을 살펴봤다.

◆ 시간마저 조각이 되다

하나의 전시를 보고 난 후 우선적으로 던지게 되는 질문은 이 전시가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것이다. 부름의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그가 조각의 본질인 물성을 끊임없이 배반하려 했다는 점이다.

물성은 고정성과 접촉성을 전제로 삼는다. 멈춰 있어야 하고 또 만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그는 시간을 양감, 부피, 표면처럼 조각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보았다. '에피쿠로스 태양 아래 빛을 쬐시오'(2007)는 램프와 받침대, 그리고 벽면에 10㎝ 크기로 그려진 지시 드로잉으로 구성된 간결한 작품이다. 관람객은 드로잉에 그려진 모습대로 작가가 의도한 퍼포먼스에 참여하며 스스로 조각이 된다. 작품엔 '1분'이란 제목이 달렸지만 1초짜리일 수도 있고 5분, 10분일 수도 있다. 관람객은 작가가 지시한 동작 이미지를 보고 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실패를 반복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조각의 고정성은 해체된다.

부름은 "1분 조각 시리즈 중 하나로 짧은 시간 동안 관람객이 직접 조각이 되어보는 참여형 연작이다. 행위도 조각이 될 수 있을까. 동작의 속도를 늦춘다면 조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했다. 박현진 수원시립미술관 전시담당은 "행위가 조각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작가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흰색 합판으로 만든 박스에 누워 뚜껑을 두 발로 지탱하는 지시 드로잉 '두 잇'(1996), 냉장고 옆면에 머리를 넣는 지시 드로잉 '아이스 헤드'(2003)는 편안하게 전시를 바라보는 관람객의 지위를 박탈한다.

기록물 '8일 만에 L사이즈에서 XXL 사이즈 되는 법'(1993)은 하드커버 책으로 만든 작품으로, 시간성이란 주제에 주체의 역전이란 함의까지 함께 담아낸 작품이다. 책을 펼쳐보면 작가가 살을 찌우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 체중을 증가시키는 방법으로 그는 '눕거나 독서하기. 그동안 자두 타르트 반 조각 먹기' '점심식사. 설탕을 넣은 커피 1포트와 도넛 3개' 등의 문장을 기록해뒀다. 작가의 신체를 통한 행위가 조각을 이루고, 심지어 고정되지 않는 실체, 현재는 있지 않은 그 무엇도 전시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에르빈 부름

◆ 과잉의 시대, 과잉의 현대인

주변의 개인을 주체로 호명하는 부름의 사고방식은 우리 곁에 선 모든 현대인에게서 시대의 증상을 발견해내기도 한다. 부름이 발견한 시대의 질환은 과잉이다. 현대인은 크기에 집착하는 경향이 짙고, 크기로 타자와 나 사이의 차이를 규정하며, 때로 크기는 정체성의 동의어가 되기도 한다. 크기를 향한 열망은 현대인의 이데올로기다.

전시장 천장에서 바닥에까지 걸린 높이 11m, 폭 7.5m의 작품 '사순절 천'(2020)은 그 크기를 향한 집착을 상징한다. 멀리서 보면 연보라색 대형 스웨터일 뿐이지만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 작품의 제목에 왜 사순절이란 종교 단어가 들어갔는지, 아울러 이 작품이 처음 세상에 선보였던 장소와 시기부터 이해해야 한다. 사순절이란 부활절 이전 40일을 말하는 기간으로, 교인들은 이 기간을 엄숙한 마음으로 보낸다. 부름의 작품 '사순절 천'은 오스트리아 슈테판 대성당에 2020년 내걸렸다.

예수의 죽음이라는 고통 대신 현대인이 숭배하는 대상은 이제 현대인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할 크기로 만들어진, 심지어 따뜻한 재질의 포근한 스웨터다. 대형 스웨터는 단식 대신 비만을 택하고 물질이라는 가짜 신앙에 도취된 현대인의 속성을 그려내는 일종의 상상된 기호로 읽힌다. 특히 이 스웨터의 빛깔은 공교롭게도 성스러움을 뜻하는 보랏빛인데, 보랏빛이 옅어진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사순절 천' 앞에 놓인 부름의 또 다른 대표작 '팻 컨버터블 : 팻 카'(2019)는 분홍색 자동차 한 대를 통해 사회를 풍자한다. 지방이 가득 찬 형태의 자동차, 의인화된 뚱뚱한 얼굴의 자동차는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갈망하지만 정작 과잉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외모로 드러나는지를 신랄하게 고발한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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