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망망대해처럼 알 수 없지만…인간은 패배 않는다"

구은서 2022. 12. 9.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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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은서의 이유 있는 고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소리꾼 이자람. /두산아트센터 제공

"살아온 모든 삶을 몽땅 쏟아 낚싯줄을 당긴다!"

강렬한 문장이죠? 이 문장은 LG아트센터 서울 개관 페스티벌에서 이달 9~10일 소리꾼 이자람이 선보이는 판소리극 '노인과 바다'의 한 구절입니다.
 마치 바다 위 고기잡이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을 주죠.

소리꾼 이자람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바탕으로 판소리를 지었습니다. 그가 부채를 접어 낚싯줄처럼 거머쥔 채 혼신의 힘으로 끌어올리는 이 대목에 접어들면 관객의 눈에는 텅 빈 무대도 망망대해 위 고깃배처럼 보이죠.

이자람이 쓴 노랫말은 소설의 주제를 관통합니다. <노인과 바다>는 고기잡이 노인 산티아고의 고독한 사투를 다룬 작품입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하는 노인이었다. 여든 날하고도 나흘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했다."

그러나 산티아고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홀로 먼 바다로 나아갑니다. 마침내 낚싯줄에 그의 조각배보다도 크고 힘센 청새치 한 마리가 걸립니다. 산티아고는 노인의 몸으로 사흘 밤낮 사투를 벌인 끝에 거대한 청새치를 잡아올려요.

하지만 그는 배에 청새치를 묶고 마을로 돌아오다 상어떼의 습격을 받습니다. 산티아고는 청새치의 살점을 덥썩덥썩 베어먹는 상어를 떼어내기 위해 또 다시 바다 위 전투를 벌입니다. 기진맥진 돌아온 그의 배에 남은 건 청새치의 앙상한 뼈뿐입니다.

<노인과 바다>는 미국의 종군기자이자 소설가 헤밍웨이가 1952년 발표한 작품입니다.헤밍웨이가 이듬해 퓰리처상, 그 다음해 노벨문학상을 받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걸작이죠. 살아서 마지막으로 출간한 작품이라 '헤밍웨이 문학의 결정판'으로 통합니다.

헤밍웨이가 평소 주장했던 '빙산 이론'대로 작품은 빙산 같아요. 8분의 1만 모습을 드러내고 나머지 대부분은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는 것 같죠. 절제된 문장도 작품의 매력을 더합니다. 그래서 작품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해석을 하게 만듭니다. 

산티아고와 청새치의 대치는 언뜻 인간과 자연의 대결처럼 보입니다. 삶의 터전에서 날마다 생존경쟁을 치르는 인간의 비애처럼 다가오기도 하고요. 흘러가는 세월을 붙잡으려 애쓰는 노인의 몸부림 같기도 합니다.

기독교적 상징도 깃들어 있습니다. 주인공 산티아고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어부 '야고보'의 스페인어식 표기입니다. 산티아고가 청새치를 잡다가 손바닥에 상처를 입는 장면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과 겹칩니다. 바다를 대할 때 산티아고가 보여주는 겸손, 물고기에 대한 죄의식이 예사롭지 않게 읽히는 이유죠.

또 산티아고에게 먹을 것을 베풀어주는 마을사람 ‘마르틴’은 가난한 이웃을 위해 평생 봉사한 성(聖) 마르탱 사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한경DB

평생의 자랑이 될 청새치를 낚기 위해 온힘을 다하는 산티아고의 모습에서 예술가 헤밍웨이의 고뇌도 읽힙니다.

전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출간한 이후 헤밍웨이는 이렇다 할 작품을 내지 못했어요. 당시 비평가들은 헤밍웨이가 작가로서 종말을 맞았다고까지 했죠. 마치 젊은 어부들이 번번이 빈손으로 돌아오는 산티아고를 비웃었듯이 말이죠. 하지만 <노인과 바다>를 통해 헤밍웨이는 자신이 아직 예술적으로 건재하다는 사실을 증명해냈습니다.

열두 살때부터 소리꾼으로 살아온 이자람은 <노인과 바다>에 꽂힌 이유를 언젠가 한 언론사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노인 산티아고는 평생 바다 위에서 자신의 일을 해왔지만, 바다의 일은 여전히 알 수 없고 그래서 매일을 새롭게 도전한다. 판소리를 훈련하고 만드는 제게는 그 일이 판소리처럼 느껴졌다. 더 크게는 우리네 인생처럼 느껴졌다."

인생은 넓은 바다처럼 아득합니다. 산티아고는 평생 바닷일을 해왔지만 바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른 채 매일 배에 오릅니다. 그저 날마다 도전하고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내년 한 해에 우리에게 어떤 파고 혹은 순풍이 밀려올지 지금은 짐작할 수 없죠. 청새치와의 사투를 통과한 산티아고의 독백은 그래서 잔잔한 물결처럼 오랜 여운을 남깁니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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