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nt&Earth] 메마른 겨울의 색, 그래스Grass

2022. 12. 9.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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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 컬러 그래스 시즌

요란한 단풍이 물러나고 나면 세상은 무채색으로 변한다. 색이 없으니 생명도 사라진 느낌이다. 그러나 자연의 순환이 정지된 것은 아니다. 얼음 아래, 바위 그늘 틈 속….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언덕과 헐벗은 나무, 바람뿐인 동토에서조차 생명은 최소의 에너지를 사용하며 움트는 봄을 기다리고 있다. 이 분위기에 어울리는 식물은 역시 메마른 억새, 그래스다.

제주도에 살면서 황홀했던 풍경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꼽는 것이 가을 억새였다. 깊은 가을 억새가 바람의 노래를 부르는 날 집 근처 용눈이오름, 다랑쉬오름, 아끈(작다는 뜻)다랑쉬 오름 등에 올라 바람에 춤을 추는 억새의 군무를 보며 그 춤사위에 몸을 싣거나 따라곤 했었다. 억새는 얼핏 노란색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하얀색에 가깝다. 단지 줄기가 노란색이라 전체적으로 노랗게 보이는 것이다. 억새를 볼 때는 그 타이밍을 100번 중 90번은 해질녘으로 잡곤 했다.

붉은 노을이 세상을 물들이는 시각, 석양에 물든 억새를 역광으로 바라볼 때의 황홀함은 적어도 10년은 잊을 수 없는 감성으로 각인되곤 한다. 그 억새를 마음만 먹으면 매일 볼 수 있는 곳이 제주도이지만 도시에서 그 메마른 감성을, 아스라한 생명의 빛을 느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 감성이 그리운 사람들은 겨울 내내 억새 또는 억새와 똑 닮은 그 유연하고 강직한 풀떼기를 거실 가득히 채워놓곤 한다.

그동안 기억에 남은 억새의 풍경에는 군락과 바람, 빛이 있었다. 그런데 거실에 억새를 모셔올 때는 이 중 한 가지도 없다. 작정하고 해낼 수 있은 것은 군락뿐. 거실 한 면 또는 ‘ㄱ’자 공간에 큼지막한 화병 5개에서 10개 정도를 설치하고 모든 화병을 억새와 그의 친구들로 채워 넣으면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억새들이 흔들흔들 춤을 추는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겨울을 장식하는 거실의 주인공이 꼭 억새, 그래스 Grass일 필요는 없다. 억새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색깔과 모양이 다른 친구들로는 억새와 비슷한 색, 거의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그린라이트, 붉은 기운이 은근하게 자리잡고 있는 야쿠시마드와프, 억새 고유의 모습에 붉은색 줄기가 어우러져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퍼플폴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개인의 취향에 맞춰 그래스 숲을 이루게 할 수도 있고 억새의 본향이라 할 만한 제주도 특유의 단순함을 살려 깔끔한 연출을 할 수도 있다.

하얀색과 붉은 색이 적당히 어우러져 있는 모닝라이트, 화장기 없는 수채화 속 농촌 여인을 닮아 단아한 느낌을 선사하는 제브리너스와 골드바, 그리고 딕시랜드 등도 이 겨울 빼놓을 수 없는 억새 친구들이다. 전형적인 억새의 풍모를 지닌 아다지오, 코스코폴리탄, 레드집 등까지 억새들을 모조리 구해 거실을 채운다면 이제 전용 조명을 은은하게 밝혀줘도 될 만큼 집안은 가을, 그리고 겨울 분위기로 가득할 것이다.

가을과 겨울 거실을 억새로 채워주는 일은 식집사에게도 행운을 가져다 주는 일이다. 대부분의 식물은 급수와 영양 공급, 전지 등 돌봐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최소의 에너지로 겨울을 나는 억새는 특별한 관리를 해 주지 않아도 조용히, 말없이 이 계절을 사색의 언덕으로 인도해 주는 고마운 식물이다. 향기도 없고 색깔의 변화도 없으니 그래스로 채운 거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겨울 분위기 속에서 각자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풍요롭게까지 느껴지는 그래스 숲과 겨울나기. 지금, 화원으로 움직여볼 만하지 않은가.

글과 사진 아트만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58호 (22.12.13)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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