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는 사람들을 교류하게 했지만… 잠을 빼앗았다

2022. 12. 9.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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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중시계를 사용해 시간을 파는 사업을 했던 루스 벨빌(오른쪽)이 그리니치 천문대 앞에 서 있다. 여기서 정확한 시간 정보를 얻은 후 런던 전역을 도보로 돌며 시간을 배달했다. 김영사 제공

■ 인간이 만든 물질, 물질이 만든 인간

아이니사 라미레즈 지음│김명주 옮김│김영사

1883년 세계표준시간 도입되자

밤에 나눠 자는 분할수면 사라져

강철로 만든 철도, 세상 연결시켜

상품 대량유통되고 쇼핑 일상화

전신선 발명후 이메일·문자 소통

표정 읽고 공감하는 능력은 앗아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말했다. “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도구는 인간을 만든다.” 인간은 자연에 없는 재료를 발명하고,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욕구를 실현한다. 그런데 바람을 쉽게 이루어주는 물건이 등장하면, 우리는 그 물건에 맞춰 생활한다. 물건은 인간 마음을 서서히 물들여 자아를 바꾸고 문화를 혁신한다. 우리는 물건에 맞추어 우리 자신도 새로 발명한다.

‘인간이 만든 물질, 물질이 만든 인간’은 쿼츠 시계, 강철 철도 레일, 구리 통신케이블, 은 사진필름, 탄소 전구 필라멘트, 자기 하드디스크, 유리 실험기구, 실리콘 칩 등 근대를 대표하는 발명품들이 인간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풍부한 사례를 통해서 보여준다. 예일대 재료과학부 교수로 재직했던 저자 아이니사 라미레즈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과학 커뮤니케이터 중 한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물건은 우리가 생각하고 전달하며 공유하는 방식을 함께 변화시킨다.

20세기 초 런던 사람들은 정확한 시간이 필요했다. 기차역, 은행, 신문사는 물론이고 선술집, 주점, 호프집도 영업시간 위반을 피하려면 시간을 알아야 했다. 그러나 정확한 시간은 10㎞ 떨어진 그리니치 왕립 천문대에서만 공급했다. ‘그리니치 타임 레이디’ 루스 벨빌은 이 틈새를 파고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 그녀는 천문대를 방문해 자기 시계 ‘아널드’의 시간을 정확히 맞춘 후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그런 다음 런던으로 가서 바쁜 고객들한테 시간을 배달했다. “아널드는 4초 빨라요.”

1883년 그리니치 천문시가 탄생하기 이전에 인류는 일출·일몰 같은 자연 시간을 좇거나, 인체 시계에 맞춰 생활했다. 그러나 그리니치와 연동한 세계공통시간망이 도입되면서 인류의 삶은 영원히 변화했다. 시계는 세계를 하나로 묶어 인간 교류 폭을 확장했다. 그러나 몇 시 몇 분 같은 정확한 시간 사용이 표준화하자 인류는 강박적 시간 관리에 사로잡혀 넉넉한 잠을 빼앗겼다.

우리 조상들은 두 번에 나눠 잤다. 저녁 9시쯤 잠들어 서너 시간 정도 자고, 자정 무렵 일어나 한두 시간쯤 독서나 청소를 하거나 이웃과 담소를 나누다가 졸리면 다시 서너 시간 눈을 붙였다. 쪽잠이나 낮잠도 흔했다. 그러나 인류의 자연스러운 수면 양식인 분할 수면은 인공조명의 등장으로 밤이 짧아지고, 표준 시간 도입에 따라 시간을 엄수하려는 문화가 퍼지면서 빠르게 사라졌다.

기계 시간에 맞추어 돌아가는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시간표를 정확히 지키는 등 시간을 의식해서 살아야 했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밤에도 잠들 수 없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시간이 돈’이었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려고 이들이 택한 것은 카페인이었고, 대가로 얻은 것은 현대의 질병인 상시 수면 부족이었다.

강철로 만들어진 철도 레일은 시공간을 압축해 세상을 하나로 만들었다. 철도는 사람들의 이주를 촉진해 도시를 성장시켰다. 삶의 질은 철도 레일의 지배를 받았다. 철도를 통해 수시로 상품이 대량 유통되자 쇼핑이 일상화하면서 삶이 풍요로워졌다. 대량생산 대량소비라는 현대적 생활 양식은 강철 레일 없이 불가능했다.

구리로 만든 전신선은 빠른 정보 교환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정보 소비라는 새로운 생활 양식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메일, 문자 메시지, 소셜 미디어 등 인류를 하나의 거대한 이웃으로 묶은 전신선 탓에 우리는 이웃과 서로 표정을 읽고 대화하며 공감하는 능력을 빠르게 빼앗기고 있다.

사진은 순간을 포착해 붙잡아 두는 힘을 인류에게 부여했다. 그러나 평등하진 않았다. 1960년대에 사람들은 학교 단체 사진에서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백인 아이들은 평소와 똑같이 찍혔으나 흑인 아이들은 뭉개져 얼굴 특징이 사라진 것이다. 필름 성분 자체가 백인 피부에 최적화돼 있었기 때문이다. 코닥 같은 필름 회사들은 이를 알았으나, 1980년대 가구 회사들의 집단 항의를 받고서야 이를 정정하는 파렴치를 저질렀다.

이처럼 물건들은 우리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의도하거나 바라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를 바꾼다. 우리가 물질의 힘에 취하는 대신 항상 그 의미를 따져보고 이를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하는 이유다. 눈앞의 눈먼 쾌락이 거대한 재앙으로 돌아온 결과가 기후 위기 아니었던가. 464쪽, 2만2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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