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석레인저가떴다]이성계의 야망, 윤동주의 소망이 겹친 한양도성

신용석 기자 2022. 12. 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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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돈의문-인왕산-백악산-혜화문 8.6㎞…위대한 성곽의 영광과 슬픔
첨단도시와 자연, 과거와 현재 한 품에…둥그런 산줄기 속 600년 역사
한양도성길. 돈의문 터에서 인왕산을 오르며 뒤돌아 본 풍경. 서울 시내와 남산-청계산-관악산을 배경으로 한양도성이 용처럼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풍경.

(서울=뉴스1) 신용석 기자 = 짧은 시간에, 큰 힘 들이지 않고, 우리나라의 자연과 도시를 가장 잘 체험할 수 있는 이상적인 트레킹 코스는 어디일까? 시내에서 가깝고, 1시간을 걸어도 되고 10시간을 걸어도 되는, 아름다운 자연과 도시의 옛 모습과 현대의 풍경이 함께 있는 곳, 바로 한양도성이다.

한양도성(都城)은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만든 도시의 골격이다. 궁궐과 도심을 에워싼 내(內)4산(백악산-낙산-남산-인왕산)을 연결하는 성을 쌓아 경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성 안쪽의 존엄성과 안전, 그리고 왕권을 공고히 하고자 한 것이다. 도성의 동서남북에 4대문(흥인문·돈의문·숭례문·숙정문)을, 4대문 사이에 4소문(혜화문·창의문·광희문·소덕문)을 세워 성을 출입하는 통로로 삼았다. 이 둥그런 경계를 바깥쪽의 외(外)4산(북한산-용마산-관악산-덕양산)이 감싸 안고 있다.

한양도성의 역사는 드라마틱하다. 조선 초기에 한양의 인구가 10만 명쯤일 때 지방의 백성 20만 명을 동원하여 불과 98일 만에 18.6㎞의 성을 쌓았다. 이후 그 원형을 600년 이상 유지해왔으나, 일제강점기에 도로 확장과 일본의 신궁(神宮)을 지으면서 많은 성곽과 성문이 철거되었고, 해방 후에도 각종 건물이 들어서면서 성을 축대로 삼거나 무너진 돌을 자재로 삼았다. 나라가 약해서, 그리고 가난해서 세계문화유산급의 보물이 계속 망가져 나간 것이다.

혜화동 인근 한양도성의 슬픈 상처. 그러나 끈질긴 역사

그러다가 1968년 북한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이 터진 후 도성의 절반이 군사구역으로 보호되고, 이후 훼손된 성곽을 대대적으로 복원해서, 이제 한양도성길은 완전히 국민에게 개방되었다. 18.6㎞의 도성 가운데 현재 13.7㎞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도로와 건물이 들어서서 복원이 어렵다. 사라진 문화유산이 안타깝지만, 근대화와 현대화의 격동 속에서 이 정도의 옛것이 남아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한양도성을 하루에 다 걸을 수도 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유적을 충분히 감상하고 주변의 도시문화를 즐기면서 3~4차례 나누어 걷는 것이 좋다. 한양도성을 한바퀴 도는 걷기를 ‘순성(巡城)놀이’라 한다. 서대문이라 일컬었던 '돈의문 터'에서 인왕산 방향으로 순성놀이를 시작해보자.

ⓒ News1 최수아 디자이너

◇ 돈의문-인왕산-창의문 3.9㎞ "우람한 인왕산에 기운이 넘치고, 윤동주의 언덕에는 시심(詩心)이 넘치고"

서대문에 와서 서대문이 어디 있지? 하고 두리번거린 적이 많았다. 서대문사거리에서 250m 떨어진 정동사거리에 있었던 돈의문이 서대문이다. 돈의문(敦義門)은 '의를 북돋는다'는 의미이다. 본래 사직터널 부근에 지었다가, 1422년 한양도성을 고쳐 쌓을 때 현재의 정동사거리에 새로 지었다. 그래서 새문, 신문으로 불렀고, 이에 따라 새문안, 신문로라는 지명이 생겼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전차 노선을 내기 위해 철거되었다. 돈의문이 살아있다면 금년에 600세 생일파티를 했을 것이다.

107년 전의 돈의문 <위> 107년 전 돈의문이 있는 거리 <중간> 돈의문을 철거한 뒤 <아래> 돈의문이 있었던, 길 끝의 정동사거리.>

정동사거리에서 경희궁 사이에 돈의문박물관 마을이 있어 돈의문의 옛 영광을 음미할 수 있다. 육중한 돈의문에서 뻗어나간 성곽이 인왕산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는 모습 아래로 초기집들이 올망종말 붙어 있는 사진이 인상적이다.

돈의문 역사관 2층 창문으로 경희궁을 내려다본다. 조선 후기의 왕들이 살면서 집무를 보던 궁전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100여 채의 전각이 모두 철거되고, 현재는 좁아진 터에 5개의 전각만 복원된 '비운의 궁전'이다.

돈의문박물관 마을을 나와 길 건너의 강북삼성병원 입구에 있는 경교장(京橋莊)을 둘러본다. 백범 김구 선생이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그때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현대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직 한양도성은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가슴에 애국심이 들어섰다. 한양도성 효과다.

돈의문에서 인왕산 방향으로 첫 한양도성의 모습. 600년 역사의 검은 돌에서는 흙냄새가, 최근 쌓은 하얀 석축과 윗돌에서는 비린내가 나는 듯하다.

경교장을 나와 도로를 좀 올라가면 서울시 교육청이 있고, 그 끝의 서울시민대학 건물 밑으로 한양도성의 첫 모습이 나타난다. 600년 역사의 검은 돌들이 최근 쌓은 하얀 윗돌과 석축 사이에 끼어있는 모습이 한편 애처롭고, 한편 이렇게라도 남아준 것이 고맙기도 하다.

도로 옆 월암공원의 끝에 '홍난파 가옥'이 있다. 1930년대에 지은 서양식 주택의 붉은 벽돌과 담쟁이덩굴의 붉은 단풍잎이 햇빛에 반짝거린다. '나의 살던 고향은~', '울 밑에 선 봉선화야~' 이런 국민노래가 절로 떠오른다.

홍난파 가옥. 1930년대에 지어진 서양식 주택으로 근대문화유산이다. 왼쪽에 인왕산이 보인다.

월암공원을 지나면 도성은 사라지고, 다세대 주택가의 골목을 휘돌아 나가는 길 끝에서 얕은 담장(女牆)으로 다시 나타난다. 조금 더 가서 아스팔트 길을 넘으면 인왕산 등산로가 시작되고, 그간 조금씩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며 몸이 성치 않았던 한양도성은 이곳부터 완전한 성곽 모습을 갖추어 인왕산을 오른다.

성곽을 따라 가파른 길을 5분쯤 오르면 시내를 얕게 조망하는 사직전망대가 나오고, 조금 더 오르면 큰 아스팔트 길이 나온다. 도로를 마주칠 때마다 도성은 잘린다. 여기서 등산로는 성곽 안쪽 길과 바깥쪽 길로 갈리고, 산 중턱에서 합류된다.

<위> 인왕사 오르막의 담벼락에 그려진 인왕산 호랑이. <아래> 국사당. 본래 남산 정상에 있던 조선의 사당(祠堂)인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신궁을 지으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인왕사와 선바위를 보기 위해 바깥 길로 나간다. 계단을 길게 내려갔다가 가파른 시멘트 비탈을 한참 올라서서 당도한 인왕사는 절인지 주택인지 분간이 어렵다.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창건했다는 절이 맞는가? 할 정도로 볼품이 없다.

선바위로 올라가는 통로에 국사당(國師堂)이라는 전각이 있다. 본래 남산의 정상에 있던 사당으로 국가가 남산의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신궁을 지으면서 그 위에 조선의 사당이 있으면 안된다 하여 이곳으로 옮겨졌다. 그렇다면 돌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선(禪)바위. 검은 바위에 기다란 구멍이 숭숭 난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공포영화에 나오는 가면 같기도 하다.

국사당 건너편으로 산허리를 올라가면 기다란 바위 두 개가 스님이 장삼(長衫/윗옷)을 걸친 모습으로 서있다. 선(禪)바위다. 검은 바위에 기다란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공포영화에 나오는 가면 같기도 하다. 지질학적으로는 풍화작용으로 암석에 구멍이 패인 타포니(tafoni) 현상이다.

이 선바위를 도성 안쪽에 두자는 무학대사와 바깥에 두자는 정도전의 의견 중에서 이성계가 정도전의 의견을 선택함으로써 조선이 유교의 나라가 되었다는 스토리가 있다. 선바위는 현재 무속인들의 성지로 사용되고 있다. 절은 하지 않고 사진만 찍어대는 기자에게 어떤 무속인이 서슬이 시퍼런 눈길을 준다. 속이 뜨끔했다.

선바위에서 내려가 산 중턱을 돌아가면 곧 한양도성 등산로와 만난다. 급경사 계단을 숨차게 올라서서 중간쉼터인 범바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본다. 얼마 올라오지 않았는데도 확트인 서울풍경에 누구나 감탄사를 낸다. 짧게 내려섰다가 가파른 바윗길에서 밧줄을 부여잡고, 엉금엉금 기기도 하면서 15분쯤 올라서면 정상(338m)이다. 찬 바람이 훅 불어오니 야외 온천에 온 것 같다. 몸은 땀으로 뜨끈한데, 머리는 시원하다.

인왕산 정상 스케치. 사람 발자국으로 가운데 바위가 움푹움푹 하얗게 패여 있다.

요즘의 산 정상은 어디나 청년들로 넘쳐난다. 외국인들도 많다. 정상에서 전망은 기가 막힌다. 백악산-낙산-남산-인왕산으로 이어지는 둥그런 산줄기 안에 도시가 얌전하게 담겨있는 가운데, 백악산 밑으로 청와대-경복궁-세종로가 융단처럼 펼쳐져 있다. 인천 송도의 고층건물들이 뾰족하고, 그 너머에 서해바다가 하얗게 반짝거린다. 북쪽으로 바라보는 북한산과 탕춘대로 넘어가는 기차바위 능선길도 참 멋지다.

인왕산에서 바라보는 전망. <위> 한양도성의 산줄기 안에 서울시내가 얌전하게 담겨있는 모습. 멀리 외곽의 산줄기들이 서울을 둥그렇게 호위하고 있다. <아래> 인왕산에서 바라보는 북한산과 오른쪽의 백악산. 가까이 기차바위와 한양도성.

창의문을 향해 급한 계단을 내려서다 보면 수성동계곡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 시간이 있으면 그리 내려가 예전의 군사초소를 리모델링한 <숲속 쉼터>에 들려보자.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넓은 창 밖으로 아름다운 숲과 백악산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볼만한 책들도 있고 편안한 소파도 있어 사색과 멍때리기에 그만이다. 여기서 15분쯤 내려가면 인왕산 허리를 도는 아스팔트 길이 나오고, 확 트인 시내전망대와 요즘 핫플레이스인 <초소책방 더숲>이 나온다. 이곳도 예전의 초소를 개량한 카페다.

숲속 쉼터와 윤동주 문학관. <왼쪽> 인왕산 숲속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숲속 쉼터’. <오른쪽> 윤동주문학관의 내부 통로에서 하늘을 향해 찍은 사진. 낮에는 새파란 하늘이지만, 밤에는 ‘별 헤는 밤’이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해본다.

창의문이 바라보이는 길 끝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나온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때 인왕산에 자주 올랐고, 이 때 '별 헤는 밤'을 썼다. "별 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이렇게 길게 전개되는 시를, 그의 나이 25세에 썼다니, 그의 감성은 대단하다.

언덕 밑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을 들어서면 하얀색 병실과 검정색 감옥이 붙어 있는 느낌을 받는다. 정갈한 전시실을 숙연하게 둘러보고,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통로를 통과해, 빛이 없는 물탱크실로 들어간다. 감옥 같은 그곳에서 윤동주의 일생에 관한 짧은 흑백영화를 보고, 그리고 바깥으로 나와 눈부신 햇빛을 쪼인다. 그러면, 누구나 윤동주를 그리게 되고, 그의 감성으로 그의 시와 재회하게 된다.

◇ 창의문-백악산-혜화문 4.7㎞ "한양을 설계했던 백악마루, 최고의 전망대 곡장, 시간여행을 하는 북정마을"

창의문. 개성의 자하동처럼 경치가 좋은 곳에 있다 하여 흔히 자하문(紫霞門)으로 불렀다.

윤동주문학관을 나와 자하문 고개 위로 창의문을 올려다 본다. 도로를 내면서 도성을 싹둑 잘랐다. 창의문(彰義門)은 '올바른 것을 밝힌다'는 뜻인데, 이곳 주변이 개성의 '자하동'처럼 아름다워서 흔히 자하문(紫霞門)으로 불렀다. 그러나 풍수지리적으로 나쁜 기운이 있어 오랫동안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문을 부수고 궁궐로 들이닥친 군사들이 있었으니 바로 인조반정(反正/새 임금을 세움)을 도모한 이들이다. 세검정(洗劍亭)에서 씻은 칼을 번득이며 궁궐로 우루루 몰려가는 반란군들의 장면을 그려본다.

<왼쪽> 창의문에서 백악마루까지 기나긴 돌계단. <오른쪽> 백악산 정상은 나무에 가려 전망이 없다.

창의문에서 백악산 정상까지는 한양도성에서 가장 길고 가파른 오르막이다. 끝도 보이지 않는 급경사 돌계단을 다 오르려면 몇 번 쉬어야 한다. 30분쯤 힘껏 올라 백악산 정상(342m)에 선다. 한양도성에서 가장 높은 이곳을 백악마루라고 부른다. 그러나 장소는 협소하고 전망은 없다. 이성계와 정도전이 이곳에 올라 한양을 설계할 때에는 나무가 앞을 가리지 않아 전망이 좋았을 것이다. 그때 두 사람이 한양을 내려다보며 오늘의 서울을 상상이나 했을까?

청운대 스케치. <위> 멋드러진 소나무 사이의 전망터에서 휴식하고 있는 사람들. <아래> 백악산으로 소풍 나와 경복궁과 남산을 바라보는 어린이들.

백악마루에서 내려가다 총탄구멍에 빨간 동그라미 표시를 한 '1.21사태 소나무'를 만난다. 청와대가 지척인 이곳에 북한의 무장공비가 올라와 총격전을 벌였던 흔적이다. 곧 청운대 전망터에 다다른다. 백악마루 대신에 '서울 전망대' 구실을 하는 뷰 포인트다. 청운대에서 100m쯤 가면 청와대와 삼청동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청와대를 개방한 이후 이 길로 많은 탐방객들이 다닌다. 성곽을 따라 15분쯤 가면 성곽길에서 약간 떨어져 조성한 곡장이 나오는데, 이곳은 백악산 최고의 전망대다.

곡장에서 바라본 풍경. 가운데 백악산 정상에서 뻗어내린 성곽이 용의 지느러미처럼 다가서는 가운데, 남산 뒤로 청계산과 관악산이 불룩하고, 오른쪽 인왕산 뒤로 서해바다 위 하늘이 노랗게 물들고 있다.

곡장(曲墻), 또는 곡성(曲城)은 주변을 관찰하기 쉽도록 성의 한 부분을 둥그렇게 돌출시킨 곳을 말한다. 이곳에 서면 백악마루를 정점으로 도성의 성곽이 훤하게 보이고, 남쪽으로 남산과 관악산이, 동쪽으로 낙산과 용마산과 아차산이, 서쪽으로 인왕산 너머의 인천 송도와 수평선이, 그리고 북쪽으로 북한산 비봉능선이 쫘악 펼쳐진 경관이 조망된다. 전라도에서 온듯한 사람들이 '와따메~, 멋쩌부려~'하며 탄성을 낸다.

숙정문. 풍수지리상 나쁜 기운이 도성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문을 닫고 소나무들을 심었다. 그 나무들이 커서 운치있는 풍경이 되었다.

곡장에서 내려와 다시 도성길을 걸으면 '조선의 소나무'들이 멋지게 도열한 내리막이 길게 이어지며 숙정문에 이른다. 숙정문(肅靖門)은 ‘엄하게 다스린다’는 뜻인데, 풍수지리상 북쪽의 나쁜 기운이 도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출입을 막은 문이다. 따라서 동·서·남대문은 있어도, 북대문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못했다. 험한 산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외로운 북대문'이다.

숙정문에서 내려서면 곧 말바위안내소가 나온다. 말바위는 백악산 능선에서 마지막 바위(末바위)라는 설과 말을 매어두었던 바위라는 설이 있다. 조금 더 가면 성곽 바깥으로 나가는 길목에 전망대가 있다. 이 전망대에서 성북동 언덕과 구릉에 주택들이 빼곡한 모습을 조망한다.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가 탄생된 곳이다. 성북동에 개발 바람이 불면서 쫓겨나던 비둘기(원주민)들의 아픔을 비유했다.

성북동의 음지와 양지. 북향인 북정마을엔 그늘이 들었고, 건너편의 고급 주택지와 고층아파트에는 햇빛이 따갑다.

전망대를 내려서서 와룡공원 방향의 숲길을 가다가, 성곽의 바깥 길을 따라 내려가면 북정마을이 나온다. 허름한 집집마다 남루한 스레트 지붕과 양철지붕, 비닐천막을 덮은 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북향인 이 마을에는 짙은 그늘이 들었고, 여기서 바라보이는 성북동 주택단지와 멀리 고층 아파트에는 햇빛이 따스하게 비친다. 600년 전에 들어선 도성과, 200년 전부터 형성된 북정마을과 50년 전쯤 들어온 고급 주택과 아파트들이 한 장면에 들어온다. 한양도성은 시간여행을 하는 곳이다.

성북동에는 한번쯤 가보아야 할 명소들이 많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조선총독부가 보이지 않도록 북향으로 지은 심우장(尋牛莊), 길상화라는 분이 "천억 재산이지만 백석(시인)의 시 한 줄에 비할 수 있으랴!" 하며 요정 건물을 기증해서 조성한 길상사, 한옥주택의 전형인 최순우 옛집이 거기에 있다.

<위> 와룡공원 입구에서 올려다 본 가을과 한양도성. <아래> 한양도성의 슬픔. 와룡공원 입구 도로에서 혜화문까지의 한양도성은 건물의 축대와 담장으로 간신히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와룡공원길 끝에서 도성은 끊기고, 도로를 건너면 학교 담장의 축대 밑에서 모습을 드러내다가 사라진다. 이후 주택가를 통과하면서 도성 흔적이 간신히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며 혜화문에 이른다. 혜화문 직전의 끊겨진 성곽 위에 있던 서울시장 공관은 현재 한양도성 안내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혜화문에 오르면 거기서도 도성이 끊긴다.

성이 끊어진 자리에서 뼈가 끊어진 아픔을 느낀다. 성이 사라진 곳에서는 가슴이 먹먹한 상실감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꿋꿋하게 존재해 준 한양도성으로부터 600년을 이어온 생명력을 본다. 그런 생명력으로 격동의 역사에서 살아남은 서울의 자연과 문화유산의 흔적이 여기에 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stone1@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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