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하지만 강렬한 건축의 불씨, 제주 포도호텔

서울문화사 2022. 12. 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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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이타미 준 선생은 자신이 설계한 건축물을 통해 과시하려고 하지 않고 늘 순수하고 겸손한 자세로 그만의 서사를 만들어왔다. 포도호텔 이후로 수없이 많은 호텔과 스테이가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그럼에도 포도호텔에서의 휴식을 최고로 꼽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타미 준 선생이 불어넣은 온기 덕분일 것이다.


건축가 이타미 준의 역작인 제주 핀크스 포도호텔. 제주의 오름과 초가집을 모티프로 가로로 길게 설계했다.


체크인을 하고 객실로 걸어가다 만날 수 있는 캐스케이드 공간. 천장이 하늘을 향해 열려 있어 빛의 유입에 따라 변화하는 사계절을 만끽할 수 있다.

건축에도 체온이 있을까? 건축가 이타미 준 선생은 현대 건축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온기와 소박함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선생의 일생과 건축 세계를 다룬 다큐멘터리 〈이타미 준의 바다〉를 보면서, 선생이 툭툭 던지던 건축 언어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일본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우연한 기회로 이타미 준 선생에게 인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어느 날은 조용히 따로 부르셨다. 한국어로 자서전을 정리하고 싶은데 한일 양국의 문화와 언어를 잘 아니 일본말을 한글로 정리하는 작업을 도와주면 어떻겠냐는 이야기였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겁이 덜컥 나서 도망치고 말았는데, 그 후로 늘 선생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남아 있어 지난해 온양민속박물관의 카페 프로젝트를 맡게 되자 ‘빚을 갚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설계에 임했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온양의 현장에 가면 때때로 선생이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괜히 몸에 힘이 들어가고 긴장하게 되는 한편,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해서 선생이 설계한 구정아트센터와 마주 보게 될 나의 카페가 아름답게 공존할 수 있도록 좋은 결과로 화답하고 싶어 마음이 간질간질해지곤 했다.

포도호텔의 디럭스 한실. 한국과 일본의 정서를 모두 가지고 있는 건축가를 닮았다.

이타미 준 선생의 건축 일생에서 제주는 무척 중요한 섬이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선생이 설계한 건축물을 제주에서 만나기는 어렵지 않다. 선생은 1998년 재일 사업가를 만나 핀크스 퍼블릭&멤버스 골프클럽 하우스를 설계하고 3년 뒤 포도호텔을 발표하면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얻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봤을 때 포도송이를 닮은 건축물은 선생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는데, 저명한 인사들이 건축적 표현을 빌려 비평한 글도 많지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건축가가 ‘자기답게’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지역성에 기반해 잘 풀어낸 서사시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포도호텔을 여러 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고 투숙하기도 했었지만, 이번 촬영에서 받은 포도호텔의 느낌은 또 달랐다. 놀라운 것은 포도호텔이 포토제닉한 파사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즉, 포도호텔은 사진 한 장으로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는 건축물이 아닌 것이다. 투숙객이 체크인을 하고 복도를 지나 중정을 만나고 방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 문득문득 비치는 제주의 자연, 그 평화로운 풍경들이 매우 유기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뽐내듯이 혹은 전략적인 한 장의 사진으로 승부를 거는 영악함도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지는 빛의 양이 공간의 표정을 만들고, 때로는 빛이 반사되면서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다채로운 장면을 만들어내는 공간 경험이 너무 좋다. 낮은 건물이 자칫 지루해지지 않도록 객실과 복도의 단차가 만들어내는 대지의 입체감도 인상적인데, 지역성을 살린 건축 재료와 물성 탐구에 대한 이타미 준 선생의 고민은 충분히 전달된 듯하다.

위쪽은 한국 전통 방식, 아래쪽은 일본 전통 방식의 창살과 창호가 묘한 대비를 이룬다.


리듬감 있게 상승하는 독특한 형태의 천장.

그가 생전에 남긴 말을 곱씹으며 포도호텔을 거닐어본다. 밖에서 안을 바라보고, 안에서 밖을 바라본다. 제주라는 독특한 지역성, 오름의 능선과 민가의 지붕을 닮은 형태, 그리고 공간의 다채로운 변주. 선생이 피워 올린 겸손하지만 강렬한 건축의 불씨가 디자인을 업으로 삼는 후학들의 가슴을 자극한다. 2007년 일본에서 서울로 돌아왔을 때만 해도 한국의 건축계는 가파른 성장세에 있었지만 건축가 본연의 ‘나다운 건축’은 그리 많지 않았다. 포도호텔이 완공 이후 금세 건축 답사의 성지가 된 것은 이타미 준 선생의 나다운 건축, 체온이 있는 건축이 동시대 동료 건축가와 후학들에게 어떤 가르침과 의미로 다가왔는지를 시사한다.

포도호텔의 담백한 입구에 선 임태희 소장.


드론으로 촬영한 포도호텔의 항공 뷰.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정말 포도송이를 닮았다.

포도호텔보다 앞서 설계한 온양민속박물관에서도 밖에서 볼 때와 한발 안으로 들어가서 경험하게 되는 공간적 변화는 여전하다. 진짜로 좋은 것, 진짜로 좋은 공간이 무엇인지 순수하게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어느 날은 온양민속박물관에 가서 정원을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창고 안에 붉은색 타일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지금의 타일과는 달리 삐뚤빼뚤 손맛이 느껴지는 정겨운 타일이었다. “이건 뭐예요?” 물으니 담당 학예사가 이타미 준 선생이 구정아트센터를 지으면서 현장에서 구운 벽돌 타일이라고 답해준다.

세상에! 나는 종종 선생이 얘기하시던 ‘따뜻한 체온을 가진 공간’을 위해서 공간에 ‘심미적인 온도를 만드는 일’은 실로 어렵다고 생각해왔는데, 그날 일로 이타미 준 선생의 건축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의 비밀을 목격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현장에 앉아서 타일을 굽고, 조급해하지 않고 유유자적 공간에 진심을 다했을 것만 같은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나는 어떻게 하면 순수함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그 해답을 아직은 찾지 못했지만, 선생에게 빚을 갚는 기분으로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 언젠가 선생님이 “수고했어”라고 하실 때까지.

임태희는

임태희디자인스튜디오의 수장으로 공간 디자인이라는 작업을 통해 삶을 관찰하며 그 행위를 통해 배움과 깨달음을 얻고 있다. 가시적인 것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중시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어른스러운 미학을 탐구하며 대표 작업으로 북촌의 한지문화산업센터, 앨리웨이 광교의 두수고방, 고창의 상하농원, 온양민속박물관의 카페 등을 디자인했다.

에디터 : 정수윤  |   글 : 임태희  |   사진 : 홍기웅(C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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