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리포트]시진핑 호위하던 홍위병의 봉기···"고압 통치땐 저항의 불씨 될 수도"

여론독자부 2022. 12. 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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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중국 백지 시위의 파장
中, 감염자 한명만 나와도 무기한 봉쇄
코로나 제로 불가능 목표 설정 무리수
민생 고려 없는 정책에 백지시위 불러
'習 물러가라' 구호, 수위 점점 높아져
"제2 톈안먼으로 확산 될라" 우려 커지자
재택치료 등 '위드 코로나'로 전면 전환
군중 요구 수용, 재반발땐 '폭란죄' 빌미
'習 지지층 반란' 사회내전 가능성 보여줘
[서울경제]

중국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를 통해 3연임에 성공한 시진핑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지나친 봉쇄식 통제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백지(白紙) 시위’로 최대 정치 위기를 맞았다. 코로나19가 만연하면서 ‘우한 발원론’ 등 바이러스 확산 책임의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중국은 ‘코로나 환자 제로’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했고 목표 달성을 위한 중국 당국의 선택은 무차별적 봉쇄였다. 이 때문에 우루무치의 한 아파트에서 일어난 화재 때 제대로 소방 활동을 할 수 없었고 1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과도한 방역에 의한 참사라며 시민들이 거리로 나선 것이다.

중국 정부가 제로 코로나 방역을 밀어붙인 데는 이유가 있다. 중국의 지방 의료 체계는 거의 붕괴 상태이며 시노백과 시노팜이라는 백신의 개발국임에도 전체적인 백신 접종률이 50%에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이들 백신은 국제적 공인도 받지 못했다. 특히 80세 이상의 노인 중 3차 백신을 접종한 비율은 21%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정부의 ‘위드 코로나’ 시험은 모험일 수밖에 없다. 자칫 확진자가 급격히 늘어 중증 환자가 생긴다면 이들을 치료할 방법이 없을뿐더러 결정적인 사회불안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미국과의 갈등을 이겨내고 사회 안정을 도모한다는 시진핑 체제에 협조하면서 공산당과 정부의 정책에 순응했다. 그러나 20차 당대회가 끝났는데도 제로 코로나 정책을 완화할 기미가 없자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과도한 방역으로 경제활동이 원천 봉쇄된 점이다. 감염자가 한 명만 나와도 무기한 봉쇄에 들어가고 유전자증폭(PCR) 검사 음성 증명서가 없으면 마트조차 갈 수 없다. 3년째 기숙사에 갇혀 있는 학생들도 많다. 이 방역 체제는 대도시 방역비로만 연간 약 320조 원이 소요된다.

민생에 대한 고려 없이 한없이 이어지는 완고한 방역 정책을 앞에 두고 청년 실업자들과 대학생이 백지를 들었다. 백지는 ‘할 말은 많으나 쓰지 않아도 무슨 내용인지 다 아는 거 아니냐’는 반어적 표현이자 중국 당국의 체포와 구금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의 소련에서도 백지 시위를 한 적이 있으며 2019년 홍콩 보안법 사태 때 홍콩 시민들도 백지를 들었다. 이번의 경우 백지와 함께 등장한 것이 ‘프리드만 방정식’이다. 음역상 프리맨. 즉 자유인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고차원 우주 역학 방정식을 등장시켜 사건이 확대될 것임을 암시하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과도한 코로나 제로 정책에 ‘백지’를 들고 무언의 항의를 하던 이 활동은 곧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과도한 코로나 통제 반대에서 ‘독재 반대’ ‘공산당 반대’ ‘시진핑 물러가라’ 등 정치적 구호가 등장하는가 하면 11월 30일 상대적으로 개방적이었던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사망하자 혹시 제2의 톈안먼 사태로 확산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해외의 중국 유학생들이나 인권 단체들도 용감한 중국 시민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막강한 공권력을 이용해 철저하게 시위를 원천 차단했고 대학은 조기 방학에 들어가 학생들을 패스트트랙으로 귀향시켰다.

집회가 정치투쟁으로 변질돼 유혈 사태로 번진 경험도

중국은 지도자들에 대한 추모 집회가 정치투쟁으로 변질돼 결국 당국의 유혈 진압 사태를 겪었던 아픈 역사가 있다. 일반적으로 1989년의 톈안먼 사태를 꼽지만 사실 중국에서는 1976년 1차 톈안먼 사태도 있었다. 당시 저우언라이 전 총리의 죽음을 애도하던 시민들은 저우 전 총리의 묘소에 헌화를 했으나 중국 당국은 이를 철거했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마오쩌둥 체제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면서 공산당 타도를 외치기 시작했다. 결국 중국 당국은 무력 진압을 선택했고 덩샤오핑도 모든 직무를 박탈당했다. 이때 마오쩌둥주의자를 자처한 화궈펑이 총리에 올랐고 그는 마오 사망 이후 2년간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 활동한다.

그 후 중국의 실권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1978년 말 개혁 개방 정책을 천명했고 급진적 개혁주의자인 후야오방을 총서기에 앉힌다. 그러나 그는 1987년 풀뿌리 민주주의 격인 기층 민주 선거 시도로 당내 반대에 부딪혔고 끝내 실각하고 만다. 후야오방이 1989년 사망하자 그를 추모하기 위해 4월 5일 톈안먼 광장에 시민들이 집결했다. 대학생과 지식인들은 그가 보수파와 원로들의 미움으로 사망했고 그가 추구한 민주적 정치 개혁의 꿈도 사라졌다며 부정부패에 빠진 공산당 지도부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후야오방을 이어 중국 지도자가 된 자오쯔양 총서기는 ‘반혁명 폭도들인 학생들에게 유화적 자세를 보였다’는 이유로 실각했다. 중국 당국은 결국 탱크까지 동원한 무차별 진압으로 이 사태를 평정했다.

이때 덩샤오핑과 원로 그룹의 선택으로 중앙 정치 무대의 최고 지도자로 등극한 사람이 바로 장쩌민이다. 그는 당시 중국 제일의 경제도시 상하이의 당서기로 전자공업부 장관 출신이다. 그는 개혁 개방의 추진과 필요성에 동의하지만 톈안먼의 풍파가 상하이로 번지는 것을 철저하게 막으면서 당 중심 정치를 강조하는 전형적인 사회주의자로 개혁 개방이라는 덩샤오핑의 유업을 잘 계승했다. 특히 자본가도 공산당에 입당할 수 있다는 ‘자본가 입당론’을 통해 중국 공산당의 사회주의 성질을 변화시키기도 했다. 또 중국 외교의 지평을 확대하는 다극화 외교를 주창했고 ‘책임지는 대국’ 중국의 역할론을 국제 무대에 각인시키기도 했다.

톈안먼 사태와는 다른 민생 차원의 항의

그러나 베이징 중앙 관료들의 견제를 상하이 시기의 친신들을 중앙에 등용해 상하이방 중심의 계파 정치로 극복하려 했고 지식인들과 파룬궁에 대한 탄압으로 인권유린 차원에서 자주 도마 위에 오른다. 이러한 이유로 장쩌민에 대한 추모 열기가 시진핑이나 공산당에 대한 직접적 반대로 이어지기 어려운 선천적 한계가 있다. 중국 당국이 장 전 주석의 장례를 성대하게 거행하면서도 시위 확산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이번 백지 시위가 기본적으로 과도한 코로나 방역에 대한 민생 차원의 항의이기 때문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중국 당국은 7일 사실상의 ‘위드 코로나’ 조치인 방역 정책을 대폭 완화한 10개 조치를 발표했다. 중국 국무원은 제로 코로나의 상징인 상시적 전수 PCR 검사를 폐지하고 재택치료를 허용하며 타 지역 여행 시 PCR 검사 음성 증명 의무를 없애기로 한 것이다. 이로써 시위는 잠잠해질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했는데도 과도한 군중의 요구가 나온다면 이는 그야말로 ‘반혁명 폭란죄’로 처리될 수 있는 빌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 민중이 나선 백지 시위

그러나 이번 백지 시위는 상당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우선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특정한 반정부 반체제 인사가 아니라 일반 민중이며 시진핑의 최대 지지 세력인 애국주의 청년들이라는 점이다. 특히 20%에 가까운 실업률에 시달리는 청년들이 이제 시진핑 체제의 감시자가 될 수 있음을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다. 또 중국 사회가 일반인들이 동일 구호와 요구를 지향하면서 조직화되지 않은 가운데서도 공권력에 도전하는 소위 ‘사회 내전’ 상태로 진입할 수 있음을 드러냈다. 공산당 통치에 대한 불만과 민생에 대한 불만이 결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중국 당국이 계속 고압적 통치의 ‘정치 핵심’만 강조한다면 이는 또 다른 불씨를 잉태하게 될 것이다.


강 교수는···대만 국립정치대에서 중국 정치경제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아 중국 정치 경제, 미중 관계, 한중 관계, 양안 관계에 정통한 학자로 꼽힌다. 한중사회과학학회 회장을 지낸 뒤 중국 상하이사회과학원 명예교수, 동북아역사재단 및 해군발전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 외교부 정책자문위원과 국회 의원외교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여론독자부 opinion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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