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뜰] 목욕(沐浴)

2022. 12. 9.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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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의 겨울은 더 길고, 더 춥다.

농촌에서 추위를 한방에 날릴 수 있는 묘법은 목욕(沐浴)이다.

그런 굴원에게 '창랑의 강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고, 깨끗하면 갓끈을 씻으면 된다'고 조언했던 어부(漁父)에게 목욕은 옳고 그름의 경계를 넘어 자신의 몸을 보존하는 의식이었다.

농촌에서 목욕하려면 큰맘을 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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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더 길고 추운 농촌선
추위 한방에 이겨낼 묘법
동양 재계·서양 세례 모두
물에 몸 담그는 의식 포함
불의와 결별·일상 행복 등
사람 따라 가치·의미 달라



농촌의 겨울은 더 길고, 더 춥다. 저녁은 더 빨리 오고, 아침은 더 더디게 온다. 추운 겨울고개만 잘 넘으면 일년은 너끈하게 살 수 있으니 나이 드신 농촌 노인들에게 겨울나기는 고행(苦行)이요, 수행(修行)이다. 어쩌다 한파(寒波)주의보라도 뜨면 몸은 더 움츠리고 마음은 더 위축된다. 농촌에서 추위를 한방에 날릴 수 있는 묘법은 목욕(沐浴)이다. 목욕탕을 찾아 물에 몸을 담그는 동안 몸 안의 노폐물은 밖으로 빠져나가고 머릿속의 복잡한 심사는 잠시 잠수한다. 샤워가 몸에 물만 적시는 일상이라면 목욕은 머리를 감고 몸을 담그는 의식(儀式·Ritual)이다. 동양의 재계(齋戒)든 서양의 세례(洗禮)든 몸을 물에 담그는 목욕 의식이 포함된다.

목욕은 머리를 감는 목(沐)과 몸을 씻는 욕(浴)이 합쳐서 된 글자다. 목욕은 사람에 따라 가치와 의미가 달라진다.

초나라 대부 굴원(屈原)은 간신들의 모함으로 추방당해 강남에서 떠돌았다. 굴원은 머리를 감으면(沐) 갓을 쓰고 몸을 닦으면(浴) 새 옷을 입어야 한다고 하며, 구습의 불의에 대항하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다 오염된 세상에서 자신의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울분을 견디지 못해 멱라수에 빠져 죽었으니, 그에게 목욕은 정의며 세상의 불의와 결별하는 단절 의식이었다. 그런 굴원에게 ‘창랑의 강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고, 깨끗하면 갓끈을 씻으면 된다’고 조언했던 어부(漁父)에게 목욕은 옳고 그름의 경계를 넘어 자신의 몸을 보존하는 의식이었다. 굴원이 물에 몸을 던졌던 5월5일 단오가 되면 창포를 삶아 물을 끓여 머리를 감았으니 굴원의 믿음이 여인들의 목욕으로 승화된 것이다.

주나라 주공(周公)이 정치의 요체는 결국 사람이라며, 훌륭한 인재가 있으면 요순의 정치가 펼쳐진다고 생각해 인재를 우대하고 사랑했다. 그는 멀리서 훌륭한 인재가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목욕 도중에 세번이나 감던 머리를 움켜잡고 인재를 만나러 뛰어나갔다. 혹시나 인재가 자신이 목욕하는 동안 기다리다 떠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주공에게 목욕은 인재를 얻기 위한 기다림의 의식이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인생의 목표를 물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거창하게 자신의 꿈과 목표를 발표했으나 제자 증점(曾點)은 목욕하는 것이 꿈이라 했다. 따뜻한 봄날 좋아하는 사람과 봄 소풍 떠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석양이 질 무렵 노래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자 꿈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증점에게 목욕은 일상의 소중함을 유지하는 행복 의식이었다.

농촌에서 목욕하려면 큰맘을 먹어야 한다. 목욕탕이나 온천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차를 타고 꽤 먼 거리를 다녀와야 한다. 코로나19로 목욕탕이 이전보다는 한산하다고 하지만 탕에는 나이 드신 분들이 일찌감치 목 좋은 자리를 잡고 신참을 맞이한다. 목욕탕에는 또 몸을 씻는 ‘세신사(洗身師)’란 전문가가 있어 ‘때밀이’란 오래된 단어는 금기어가 되었다. 신체 부위와 서비스에 따라 요금이 달라 마치 키오스크(터치스크린 방식 무인단말기)에서 품목별로 주문하는 기분이다. 전기요금 탓인지 시간이 오래 걸려서인지, 여성들은 드라이기를 사용하려면 200원의 기본료를 내야 한다고 한다.

오랜만에 목욕탕에 들렀다. 나의 목욕은 어떤 가치일까? 그저 묵은 때를 벗겨내는 일상일까? 불의를 씻고 구습을 털어버리는 의식일까? 아니, 따뜻한 목욕탕 안에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내가 되는 환상의 시간일까? 겨울은 목욕을 의식으로 승화하기 좋은 계절이다.

QR코드를 찍으면 소리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박재희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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