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해에 저항하는 인간의 세계, 이 얼마나 괴이한가! [책&생각]

최원형 2022. 12. 9.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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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농업사학자가 펼치는 ‘분해의 철학’
무한성장 꿈꾸는 생산·소비 아래 은폐된 분해
자연에서 벗어난 인간만의 예외적 세상
바다로부터 떠내려온 썩지 않는 플라스틱 쓰레기들. 게티이미지뱅크

분해의 철학
부패와 발효를 생각한다
후지하라 다쓰시 지음, 박성관 옮김 l 사월의책 l 2만3000원

생태계란 “두 화합물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교환 시스템”을 의미하는데, 그 주고받음을 담당하는 생물은 크게 생산자·소비자·분해자로 나뉜다. 생산·소비·분해의 시스템은 어릴 때 배웠던 익숙한 그림을 떠올리게 만든다. 태양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는 식물은 생산자, 그것을 먹는 초식동물과 초식동물을 먹는 육식동물은 소비자, 동물의 사체나 배설물을 탐하는 균류나 미생물은 분해자. 경제학에서 빌려온 이 세 가지 개념 가운데 ‘생산’과 ‘소비’에 길들여진 우리는 평소 ‘분해’의 세계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세 작용이 연속되는 순환 시스템이나 지속가능성 같은 말을 쉽게 쓰긴 하지만, 존재가 붕괴된 뒤 껍질이 벗겨지고 알맹이가 튀어나와 악취를 풍기며 다른 존재에게 뜯어 먹히는 실제 자연계의 분해 과정에는 눈을 돌리고 만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썩지 않는 세계’, 그러니까 분해를 은폐한 생산과 소비의 천국이다. 조금의 손상도 견디지 못하고 반짝이는 새것들로 바꿔놓는 세상, 쓰레기를 줍는 넝마주이를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시키는 세상, 오직 또다른 생산과 소비를 위해서만 분해를 이용하는 세상이다. 모든 것이 결국 분해될 운명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인간이 만든 이 세상은 얼마나 괴이한 세상인가?

일본의 농업사학자 후지하라 다쓰시(46)는 <분해의 철학>에서 분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것이며, 심지어 “시간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지은이는 자연과의 공생을 추구했던 나치가 왜 인종 말살을 자행했는지(<나치 독일의 유기농업>), 근대 세계에서 주방은 어떻게 시스템화되었는지(<나치의 주방>), 대도시 저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어떻게 버려진 물건을 모아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으로 바꾸었는지(<고물과 쓰레기의 인문학>), 트랙터가 농업을 어떻게 바꾸었는지(<트랙터의 세계사>) 등 음식·농업에 대해 독특한 연구를 펼쳐온 학자다. 이번 책에서는 ‘분해의 철학’이라는 이론을 세워, 인간계와 자연계를 횡단하는 굵직한 문명비판적 작업을 수행한다.

그래픽 동혜원 hwd@hani.co.kr, 게티이미지뱅크

지은이는 “지구상에서는 하나하나의 물질에 질서를 부여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작용 쪽이 시한부 예외에 불과하고, 반면 부패, 분해, 붕괴되어가는 것이야말로 실은 본래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생산과 소비의 작용에만 매몰된 인간은 자연계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분해력으로부터 갈수록 멀어지는 길을 밟아왔으며, 되레 그것을 진보나 발전으로 취급해왔다는 것이다. 분해에 대한 본격적인 사유는 여지껏 없었기에, 지은이는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제국>, 유아교육의 창시자 프리드리히 프뢰벨이 고안한 나무블럭 장난감, 카렐 차페크의 미래소설, 근대 세계의 넝마주이, 생태학사 속의 분해 개념, 인간의 수리 문화 등에서 ‘분해의 철학’ 재료들을 찾고, 부족한 부분들을 스스로 메워나간다.

송장벌레 애벌레가 부패하지 않은 사체 양육장에서 자라고 있다. 샤타누 슈클라, 막스 플랑크 화학 생태학연구소 제공.

프뢰벨은 아이들을 위해 여러 방식으로 조합할 수 있는 나무블럭들을 만들었는데, 아이들은 “하나의 완성품인 나무물체를 분해하거나 변형함으로써 세계에는 부분과 전체가 있다는 사실을 논리로 이해하기 전에 신체로 느낀다.” 여기서 지은이가 주목하는 대목은, 나무블럭은 쌓는(생산과 창조) 것이지만 궁극적으론 무너뜨리는(분해)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나무블럭은 잘 쌓도록 만들어져 있기도 하지만 잘 미끄러지도록 만들어져 있기도 하다. 무너뜨림을 전제로 만들어졌기에, 어쩌면 쌓는 것보다 무너뜨리는 것이 더 먼저라고 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지은이는 ‘푼다/풀린다’는 뜻의 일본어 고어를 탐색하며 “분해야말로 곧 시간의 시작”이라 짚는다. 창조와 파괴가 반복되듯 응고와 해체는 반복되기 마련이지만, “대지가 요동치고 무너지고 찢어지고 반석이라 믿어왔던 사이클이 ‘풀리면’, 동시에 ‘때’(시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세계 자체의 생산, 구축, 확대는 분해, 붕괴, 감축을 기반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게다가 분해는 우리가 막연하게 바라듯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 위한 목적으로 얌전히 돌아오는 매끈하고 반들반들한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형태 전환의 축제성, 그리고 온갖 생물들이 떼로 달라붙어 먹어 치우는 잔혹하고 소름 돋는 떠들썩함”이다. 먹으면서 동시에 배설하느라 “한줄기 칠흑 같은 실”을 뽑아내는, 파브르가 사랑한 소똥구리가 보여주듯, 생태계 모든 것이 물질 순환의 통로다. 이 “물어 죽이는 축제”, ‘분해의 향연’에는 분해하는 쪽과 분해되는 쪽 사이의 암묵적 협력 아래 생태계 전체가 참여하고 있다. 인간 역시 화폐를 매개로 무언가를 구매하듯 ‘소비’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먹는 일’로 여기에 참여하고 있는 분해자 가운데 하나다. 이런 의미에서 지은이는 “결국 생태계는 생산자·소비자·분해자라는 생물 그룹들로 나뉘는 게 아니라 광합성이라는 ‘생산’ 현상, 그리고 ‘분해’ 현상,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며, 그중 ‘분해’ 현상은 다양한 생물들이라는 ‘탈것’에 오르락내리락하며 종횡무진 돌아다니고 있다”고 말한다. 분해는 어떤 특정한 수익자를 상정하는 ‘기능’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 깃들었다가 떠나는 ‘작용’으로, 그 어떤 중심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의 농업사학자 후지하라 다쓰시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 교토대 누리집 갈무리

그러나 지은이가 네그리·하트의 논의에서 뽑아내듯, 인간 문명이 만든 ‘제국’이란 장치는 분해 세계를 따라함(의태)으로써 생산과 소비의 왕국이 담지 못한 분해 세계를 장치 안에 품으려 한다. 오래된 서비스나 물건들을 일단 파괴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서비스와 물건들을 산출해내는 “창조적 파괴에 의한 시장의 창출”이다. 그러나 장치는 언제나 생산을 분해보다 우선시하며, 어떤 의태로도 인간은 “물어뜯고 깨물어 죽이는 능력에서 동물들에게 승산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는 인간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동물에게서 배워야겠다고 결심”이라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카렐 차페크가 그린 것처럼, 불로불사를 꿈꾸며 ‘분해에 저항하는 세계’를 만들다가 끝내 역사의 끄트머리에 서고 마는 인류가 되지 않으려면.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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