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 8년 만의 신작 ‘원청’, 절멸하지 않는 인간에 대하여 [책&생각]

임인택 2022. 12. 9.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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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표작가, 8년 만의 신작
반세기 천착 뒤 세기 전 배경
비극-촌극, 절망-해학 뒤섞어
‘절멸 않는 인간’ 유려한 서사시

원청: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l 푸른숲 l 1만8500원

노벨문학상 후보로 때마다 거명되던 중국 작가 위화(62). 1983년 단편 ‘첫번째 기숙사’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장편은 모두 다섯 편뿐이었다. <허삼관 매혈기> <형제> 등. 10년 전 먼저 노벨문학상을 받은 <붉은 수수밭>의 모옌(67)을 두고 “생각이 충분해지면 한숨에 글을 써내려간다”며 자신에겐 “그런 능력은 없는 것 같다”던 2013년의 말을 다시금 지키기라도 하듯 이번 신작을 더하기까지 8년이 걸렸다.

지난해 중국서 출간되어 150만명이 사보았다는 <원청: 잃어버린 도시>이다.

원청은 양쯔강 건너 남쪽 600리 아래 도시의 이름이다. 당나귀라곤 본 적 없는, 문 앞이 바로 강인 물의 고장. 이 구체성은 원청의 실체성을 증거하나 ‘원청’은 없기에 누구든 원청을 찾다간 길을 잃는다. 그러나 누구는 원청으로 간다, 가야만 한다. 잃어버린 도시는 잃기 전의 도시이자 되찾으려는 도시가 되어, 불멸하는 도시다. 위화가 “모든 사람의 가슴에는 원청이 있다”는 중국 독자의 말을 빌려 한국어판 서문을 쓴 이유일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원청의 여자를 사랑한 한 남자, 두 남자를 사랑한 원청의 여자가 주인공이 되어 전개하는 이야기에 앞서 두 대목을 기억해둘 법하다.

“두 사람은 우물과 강물처럼 처지가 달랐다. 한 사람은 우물에 대해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강물에 대해 생각했다… 한 사람은 우물의 말을 하고 다른 사람은 강물의 말을 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거칠게 이 둘로 나뉜다. 우물은 머무는 자의 운명이고 강물은 떠나는 자의 운명이다. 우물은 보듬어 안는 이, 강물은 풀어헤치는 이의 것이다. 운명은 때로 욕망으로 헐고, 욕망은 운명에 나앉아 소설 속 우물과 강물 사이는 어지간하면 좌절이다. 슬픔엔 자비가 없어 선행한 슬픔 뒤로 연이어 닥치길 주저함이 없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청말의 중국 대륙을 배경으로 하기에 재난엔 도대체 단절이 없다.

그런데도 이 ‘인간’들은 절멸하지 않는다. 두 번째 상징으로 꼽아본, 아마 이런 대사에서 감지되는 함의 덕분이리라.

“아이한테 이름이 있나요?” 린샹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100여 집의 젖을 먹어서 린바이자(林百家, 임백가)입니다.”

엄동설한 이름 모를 여염집 여인들의 젖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원청에 이른 ‘린바이자적 삶’. 바로 무너질 수 없는 민중들의 공동체적 운명도, 욕망도 아우른달까. 소설은 기실 100년 전의 이 불멸성에 대한 헌사다.

기미로 충분하다면 여기서 책을 직접 펴보는 게 좋겠다. 이제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옮겨본다.

중국 작가 위화. 푸른숲 제공

린샹푸는 ‘원청’에서 1000리 떨어진 황허 북쪽 남자로 5살, 19살에 각기 여읜 부-모로부터 적잖은 재산과 단단한 성품을 물려받았다. 훌륭한 목공이기도 한 그에겐 가족과 다름없는 집사 톈다의 5형제들이 있되 매파의 실수로 귀한 혼인의 연을 놓치고 24살 노총각이 된다. 청색 날염 두건에 꽃문양 치파오를 입은 여자와 남자가 하룻밤을 청한 건 그해 가을. 오빠라는 남자 아청은 아프다는 동생 샤오메이를 곧 데려가겠다며 이튿날 떠난다. 우박이 마을을 부순 한겨울, 남겨진 린샹푸와 남겨진 샤오메이는 “물고기처럼” 서로의 몸으로 “미끄러져” 간다(몇몇의 성애 장면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장면을 떠올린다). 린샹푸가 대대로 쟁여둔 가산을 보여줄 때부터 조마조마하더라니, 샤오메이는 해 바뀐 초봄 보름치 음식과 새 옷을 지어 집에 남긴 채 금괴를 들고 사라진다. 다섯달 만에 또 홀로 남겨진 린샹푸는 오열했으나 샤오메이가 얼마 뒤 아이를 밴 채 다시 나타나자 용서하고 다짐한다. 또 떠나면 “아이를 안고 세상 끝까지 가서라도 당신을 찾을 거”라고. 샤오메이는 태어난 지 사흘 된 딸의 배냇머리와 눈썹만 붉은 천에 담아 마을을 떠난다. 홀연히 오고 또 와 가고 또 간다.

샤오메이와 아청이 왔다는 도시가 ‘원청’이다. 그러니, 전 재산을 집사에게 맡기고 딸아이를 업은 채 린샹푸가 찾는 도시가 원청이다. 이 여로는 19세기 중국 민초들이 출신, 인연에 관계없이 속절없이 감당한 온갖 역경의 행로와 다름없다. 와중에 지어진 린샹푸와 샤오메이의 딸아이 이름이 ‘바이자’(100개의 집)다.

청말의 관군 북양군과 국민혁명군 간 전쟁, 토비의 창궐에 치 떨리는 공포와 궁핍을 겪고, 그러든 말든 수해로 폭설로 대지는 곤죽이 된 진흙밭이라 해도 지나칠 게 없던 때, 의 민초들 이름을 하나하나 애써 부르는 듯한 이 소설을 출판사는 위화의 첫 전기(傳奇)소설이라 이른다. 비극과 촌극, 절망과 해학, 사랑과 사랑이 기이한 민담과 지극한 현실로 뒤섞여 유려하게 구술되는 탓이겠다. 하지만 이 모두 ‘리얼리즘’의 극대화를 위한 장치래도 억지랄 게 없겠다.

사후 연옥에 당도한 원혼들을 소재 삼아 중국 현실을 꼬집은 전작 <제7일>의 2013년 출간 때 위화가 국내 인터넷서점 관계자들과 나눈 대담에서 “지금 중국은 소설보다 실제 모습이 좀 더 황당하다… 소설이 아무리 황당해도 중국 현실을 따라가지는 못한다”고 웃어 말한 대로다. 다르게는, 1989년 6월4일 톈안먼 사태를 국가가 검색 차단하자 누리꾼들이 우회 사용한 ‘5월35일’을 차용해 스스로 이른 ‘5월35일적 소설 방식’.

중국 작가 위화. 푸른숲 제공

지금껏 위화가 1950년대 이후에 천착했던 대표작들과 달리 20세기 전후 격변기로까지 거슬러 가는 이유와 직전 사후로 거슬러 올랐던 이유가 다르지 않을 텐데, <원청>은 존재를 지켜내는 ‘인간’ 자체에 더 각별한 애정을 쏟고 있다.

때문에, 린바이자와 정혼한 소년 구퉁녠과 구 형제들처럼 기담으로만 전해진 이들의 ‘부재’, 정작 대서사의 말미엔 등장하지 않는 린바이자의 ‘부재’는 하다만 얘기처럼 의문을 남긴다. 중국 3세대 작가군에 대한 국내 관심과 흥행이 대개 반세기 중국 사회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또 하나의 도전이 되겠다.

오는 15일 예정된 ‘위화가 말하는 중국의 1900년대’ 주제의 강연(대산문화재단 누리집에서 신청)을 통해 더 깊은 속내를 들어볼 만하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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