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항녕의 조선, 문명으로 읽다] 최제우의 깨달음…여종 둘을 수양딸과 며느리로

입력 2022. 12. 9. 00:21 수정 2022. 12. 9.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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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새로운 여명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지금도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19세기 조선 말기를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특징지으며 민생은 피폐해지고 망해간다고 설명한다. 혹자는 인구가 줄고 토지 생산성도 낮아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정부의 진휼 기능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으며(문용식, 2001), 농지의 수확을 분석할 때 19세기 후반의 생산성은 18세기와 유사하다.

혹자들이 주장하듯 두락(斗落)당 생산량이 4분의 1에서 3분의 1 수준으로 하락했다면, 길게 보아 수십 년간 대부분의 사람이 기아선상에 한참 못 미치는 조건 속에서도 꾸준히 납세까지 하면서 생존을 유지해 나간 셈이 된다. 누차 강조하듯이 이렇게 상식적이지 않은 역사상이 그려질 때는 자료와 연구방법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

조선과 청나라의 홍삼 무역 활기

경북 경주시 구미산 자락에 있는 천도교 발상지 ‘용담정(龍潭亭)’. 수운 최제우가 1860년 4월 이곳에서 천도교를 창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말 청나라와 이뤄졌던 무역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포착된다. 대청 홍삼 무역은 1797년 공인됐다. 처음에는 사신과 역관들이 가져갈 수 있는 수량이 120근이었는데 당시 홍삼 1근의 가격은 은(銀) 100냥, 동전 300~400냥에 달했다. 법정 쌀 가격(1석 5냥)으로 환산하면 1근당 60~80석에 해당하는 고가품이었다. 청나라에 가서 팔 때는 동전 1100~2300냥으로 국내 가격의 3.5~7.5배에 달했다.(유승주, 이철성, 2002)

처음에는 사신 행차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는 목적에서 시작됐는데, 돈이 되다 보니 점차 재정에 보용할 목적으로 규모가 커졌다. 1811년 200근을 시작으로, 1847년 4만근으로 급증했다. 1881년에는 2만5000근으로 내려갔지만, 홍삼 무역으로 거둔 세입은 4만근일 때의 20만냥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히 세수의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 “모두가 하늘” 남녀·신분차별 없애
조선 후기 노비 소멸 과정과 겹쳐

‘반봉건 반외세’는 부분적인 해석
민본 중시한 조선의 위기 대응력

“사람과 사물 죽이지 않는다” 선언
왕조는 끝나도 역사는 계속 흘러

홍삼 판매 역시 엄청난 이윤을 남겼다. 1910년 무렵 중국 시장에서 판매되는 각국산 최상급 인삼 1근의 가격을 보면 만주산 20원, 미국산 50원, 일본산 18원인데 비해 개성산은 200원에 이르렀다. 정조 연간의 가격을 대입해보면 홍삼 4만근 수출액은 4400만~9200만냥에 이른다. 1807년 당시 서울로 올라오는 동전이 135만냥이었고, 이는 당시 총통화량의 7분의 1에 달하는 규모였다. 법정 쌀 가격에 따라 환산하면 880만~1850만석에 해당한다. 19세기 조선정부 재정에서 국가적 물류 규모가 500만석 정도였으니, 홍삼 수출액은 천문학적 규모였다.

다시 돌아본 역동의 19세기

최제우의 묘와 묘비.

19세기는 또 다른 역동의 시대였다. 농민들은 당시 인구가 증가하고 생산성이 하락하는 경향이 나타나자 다량의 노동력을 투입하거나 경작 작물을 다각화하여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으로 전환하며 대처해 나갔다. 지대율이 낮아지는 것도 생산성의 위기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지배층이 체제 위기를 외면하는 현실 속에서 향촌 공동체가 자율적으로 혹은 사회적 관계의 변화 속에서 위기에 대응하고자 했던 노력의 소산으로 해석하는 편이 타당해 보인다.

1862년 삼남 지역을 휩쓴 민란이나 1894년 동학농민전쟁도 체제 위기, 생존 위기에 따른 반발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조선사회의 체제와 지배 이념 속에서 누적돼 온 경험과 다양한 분야의 변화 속에서 내면화한 나름의 정당성, 즉 인정(仁政)과 민본(民本) 이념을 기반으로 질서를 회복하려는 노력이었다.(배항섭, 2012)

정조 사후, 19세기는 정치적으로 사림정치 질서가 무너지고 외척 세도정치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부터 서울과 지방에서는 전통적 질서의 와해와 함께 다양한 학풍과 종교 운동이 나타났다.(유봉학, 2012) 서울 학계에서는 북학과 서학이 유행하고 천주교가 세력을 확대했다.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혜강 최한기 등은 그중 유명한 인물일 뿐이다.

동학은 조선 역사의 산물

경북 상주 동학교당 유물전시관에 남아 있는 『용담유사』 목판. [중앙포토]

무엇보다 동학(東學)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였다. 동학을 일으킨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는 이 우주를 하늘님으로 표현했다.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었다.(표영삼, 2004) 19세기에 등장했지만 동학사상을 ‘반봉건 반외세’로 국한하거나 19세기의 신흥종교로만 보면 그 역사성을 읽기에 부족하다.(김용옥, 2021)

동학은 남자와 여자, 귀하고 천함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수운은 크게 깨달은 뒤 먼저 자신의 여종 둘을 해방시켰다.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고, 다른 사람은 며느리로 삼았다. 나는 이 상황이 당시 조선 사회의 노비제 약화 또는 소멸 과정과 겹친다고 본다. 즉, 17세기 현종 때부터 ‘노와 양처(良妻)에게 태어난 자식은 평민이 된다’는 법이 만들어져 영조 6년(1730)에 확정되어 『속대전(續大典)』에 실렸다. 노비제에 대한 이런 사상의 기조와 정책은 1801년(순조1) 납공(納貢)하던 내수사와 각 관청 노비의 양인화, 1886년 노비세습제의 폐지, 1894년 노비제의 전면 폐지로 이어졌다.(2021년 9월 17일자 칼럼) 수운의 사상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조선 역사의 산물이다.

‘피를 묻히지 않은 병사가 으뜸’

수운 최제우 영정

1894년 전라도에서 동학농민전쟁을 시작할 때 이들은 4개 조항의 캐치프레이즈(名義)를 내세웠는데, 그중 첫 번째가 ‘사람과 사물을 죽이지 않는다(不殺人, 不殺物)’였다. 이것이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긴 병사를 으뜸 공으로 삼는다’ ‘전투를 하더라도 인명을 일절 살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전투 지침으로 이어진다.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더하여 ‘사물을 죽이지 않는다’는 태도라니….

나는 여기서 18세기에 벌어진 인물성(人物性) 논쟁의 흔적을 읽는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의 대립적 이해를 넘어서는 사상적 지평이 이들의 삶에 확보되어 있었다. 이는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의 삼경(三敬) 사상으로 체계화됐다.(오문환, 2006)

천지(天地)가 때론 모질듯 역사 또한 그러하여 조선 사람들은 20세기에 험한 일을 겪었다. 최제우가 읊고 최시형이 간행한 동학의 경전인 『용담유사』의 말대로였다. “인심, 풍속 살펴보니, 어쩔 방도 없도다.” ‘서로 돕고 나누기 좋아하던 사람들’(천주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다블뤼 주교)도 피해갈 수 없던 난세를 넘어선 분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조선이라는 낯선 세상

지난 8월부터 독일 튀빙겐 대학에 머무르고 있다. 특강 때 “‘거룩한 고전(holy classic)’ 하면 무엇이 떠오르냐”고 학생들에게 물었다. 잠시 웅성거리다 어떤 학생이 조심스럽게 “바이블(Bible)?”이라고 대답했고, 다른 학생들도 동의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거룩한 고전’, 즉 성경(聖經)은 성서(聖書)를 가리킨다. 아마 21세기 한국의 대학생에게 같은 질문을 했어도 마찬가지의 답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사람에게 거룩한 고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면 바이블이 아니라 『논어(論語)』나 『맹자(孟子)』라고 답했을 것이다.

이것이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조선보다 유럽의 언어와 사유에 훨씬 가깝다는 하나의 사례라고 추정하면 무리일까. 초·중·고 학제와 커리큘럼이 19세기 이래 유럽에서 유래했으며, 나아가 현재 우리와 서구의 정치와 사회, 문화생활의 유사성을 고려한다면 지금 우리는 조선 문명의 후예일까, 유럽 문명의 후예일까.

이 질문은 2년 동안 연재한 ‘조선, 문명으로 읽다’의 문제의식과 연결돼 있다. 조선은 다른 세상인 것이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낯선 세상 말이다. 그렇기에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근대주의에서 벗어나 접근하면 다른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학계의 연구조차 충분히 담지 못했다. 나의 역량이 부족한 탓이다. 이 짧은 조선시대 입문 여행을 함께해 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 앞에서

이삭 줍는 여인

밀레(J F Millet)의 ‘이삭 줍는 여인들(The Gleaners·사진)’을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밀레가 가난한 농부의 버거운 삶을 묘사했다고 한다. 이삭을 줍고 있으니 그렇게 설명할 만하다. 또 1857년 파리 살롱에 이 그림을 발표했을 때 지주들은 ‘사회주의적’이라고 비난했단다.

이삭줍기는 여성과 어린이의 몫이었다. 이는 잉글랜드의 ‘대헌장(Magna Carta)’ 7조에 나오는 ‘에스토버스(Estovers)’에 근거를 두었는데, 생계가 불안정할 수 있는 여성이 가진 권리를 말한다. ‘Estovers’가 노르망디 지방 말이라고 하니 노르망 정복 때 잉글랜드로 넘어와 ‘대헌장’에 반영된 것이며, 그 관행은 밀레 때까지 파리 근처에도 남아 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삭 줍는 여인의 가난과 함께, 이삭줍기의 권리를 인정하는 시스템에 주목한다. ‘대헌장’뿐 아니라 조선의 관습, 튀빙겐의 협약에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 조치가 등장한다. 사적 소유나 경쟁보다 도움과 연대가 훨씬 보편적인 심성과 역사에 가깝다.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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