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감정 없지만 가족이 된 남녀... 그게 뭐 어때서요?

장혜윤 2022. 12. 8.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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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애 중독사회에서 '무성애'를 말하다 ③] 미디어가 말하는 무성애

바야흐로 유성애 중독 사회다. 그 중심에서 연애 혹은 섹스하지 않을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에이엄브렐라' 성향의 이들이다. 에이엄브렐라는 어떠한 성별에도 정신적 사랑을 느끼지 않거나 육체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성 지향성의 총체를 일컫는다. 우리에겐 무성애란 이름으로 더 익숙하지만, 이보다 포괄적인 상위 개념으로 사용한다. 생소한 용어만큼 소외된 집단. 한국 사회에선 있어도 없는 존재였던 에이엄브렐라 성향자를 만나 그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기자말>

[장혜윤 기자]

세상에서 보이고 들리는 '사랑'이 걸맞지 않은 사람들

대학에 입학하고 첫 연애를 시작했다. 들뜬 마음이었다. 상대의 마음을 추측하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것은 꽤 설레는 일이었다. 그러나 만남 뒤에 어김없이 찾아온 이별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왜 헤어지자고 하지?" 이별을 당할 만큼 큰 잘못을 했나 의문이 들었다.

상대에게 이유를 묻자 "취업 준비 때문에 연애할 여유가 없다"며 돌아온 대답도 의아함을 온전히 씻어주진 못했다. 대개 사람들이 시험이나 취업 준비를 하게 됐다고 주위 관계를 모두 끊어내진 않지 않는가. 설사 만나는 횟수를 줄일 수는 있어도 말이다.

이제는 스스로를 '에이로맨틱 바이섹슈얼'로 정체화한 정치인 A씨의 얘기다. 그는 18살 무렵 본인이 바이섹슈얼(양성애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에이로맨틱'이란 이름표를 추가하게 된 건 그보다 좀 더 뒤의 일이었다. A씨는 이별 당시를 두고 "절친에게 손절 당한 기분이었다"고 설명했다.

미디어를 통해 보고 들은 '사랑한다'는 개념, 아무리 곱씹어도 연애했던 상대가 그 개념에 부합하는 것 같질 않았다. 그런데 TV나 드라마 속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 그런 식으로 관계를 시작하고, 유지하고, 끝냈다. 이 방식이 세상에서 용인되는 연애의 상식이었다.

"연애 정상주의 사회에서 무성애자는 어딘가 결핍된 사람으로 취급받기 쉽다"고 A씨는 말한다. 한국의 미디어는 연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권장하는 분위기다. 드라마나 영화에 유성애가 그려지는 것을 넘어 이제는 일반인의 연애를 다룬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다양하다. <환승연애>, <하트 시그널>, <나는 솔로>, <자보고 만남 추구>, <마녀사냥> 등 대중들은 성과 로맨틱을 다룬 프로그램에 열광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사랑의 부재를 어색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무성애로 정체화하는 과정에 있는 B씨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에이엄브렐라(무성애자)인 캐릭터가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매체가 가진 힘은 무시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숱한 드라마, 영화, 예능이 연애를 당연한 삶의 한 부분으로 묘사하고, 연애가 가져다주는 행복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무성애자 대부분은 정체화 전까지 본인이 '아직 연애를 하지 않은' 상태로 규정하기 쉽다. 본인은 깨닫지 못했지만 '알고 보니' 에이엄브렐라인 경우의 이들에게 미디어가 적합한 첫 도움을 줄 수 있다.

실제로 또 다른 무성애자인 C씨는 미디어를 통해 무성애를 처음 인식했다. "<이윽고 네가 된다>라는 만화를 읽으며 주인공의 심리 묘사를 인상 깊게 봤다. 내가 느꼈던 감정과 닮아 공감을 많이 했는데, 이때부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상했다.

그 역시 "미디어 매체에서 연애 감정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다뤄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무성애나 혹은 그 비슷한 관점을 가진 인물 묘사가 많이 다뤄진다면 그에 공감하는 '숨어 있던' 에이엄브렐라들이 저도 모르던 정체성을 찾아낼 수 있다는 말이다. C씨는 무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할 사람, 매체가 없어서 외로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난 그냥 섹스에 관심 없을 뿐이야" 외국 콘텐츠 속 무성애

단지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걸 미디어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상황은 제법 달라질 수 있다. 무성애는 해외 미디어 콘텐츠에서 이미 그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애니메이션 <보잭 홀스맨>과 드라마 <섀도우 헌터스>에는 에이섹슈얼 캐릭터가 등장한다.

<보잭 홀스맨> 시즌3에서는 등장인물 토드 차베스가 에이섹슈얼로 정체화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그는 20대 후반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게이나 스트레이트가 아닌 "Nothing(아무것도 아님)"으로 정의한다. 토드에겐 어느 성별에게도 성적 욕망을 느끼지 않는 자신을 설명할 언어가 부족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로 회피할 수밖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토드는 에이섹슈얼 정체성을 찾아 나가는 여정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을 "Nothing"으로 생각했던 많은 에이엄브렐라에게 용기를 주었다. <보잭 홀스맨> 시즌4에서는 토드가 에이섹슈얼 모임에 참여해 여러 에이섹슈얼과 만남을 갖고 데이트를 하는 등 무성애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섀도우 헌터스>는 뱀파이어, 천사, 늑대인간 등의 인간이 아닌 존재가 등장하는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다. 이 작품에선 등장인물이 직접적으로 자신을 에이섹슈얼이나 에이로맨틱으로 정의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극 중 뱀파이어인 라파엘 센티아고는 자신에게 키스해달라고 하는 이자벨에게 말한다. "I'm just not interested in sex.(난 그냥 섹스에 관심이 없어.)"

의아한듯 '뱀파이어가 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냐'고 묻는 이자벨에게 라파엘은 "항상 그래왔다"고 답한다. 에이섹슈얼이라는 용어가 명시적으로 나오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명백한 무성애자 인물을 묘사한 셈이다.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 스틸컷.
ⓒ 일본 NHK
 
올해 초 방영된 일본 드라마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은 무성애자가 사회에 부딪치면서 겪는 갈등과 고민을 좀 더 깊게 다뤘다. 작품은 무성애자 여성과 남성이 만나 가족이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 사쿠코는 연애 감정이 없지만 가족을 이루고 싶은 상대 사토루를 가족에게 설명하는 데 애를 먹는다.

자연스럽게 연애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져 가정을 꾸려온 부모님 부부나 동생 부부에게는 에이로맨틱, 에이섹슈얼 같은 말이 어렵기만 하다. 딸인 사코쿠가 남자인 사토루와 함께 살고 싶다고 하니 사랑하는 사이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는 딱히 사귀고 있지 않고 연애 감정 같은 것도 전혀 없어"라며 토하듯 내뱉는 사코쿠가 사랑이 당연한 이들에겐 도통 납득이 가질 않는다.

"그럼 납득도 이해도 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요. 다만, 어째서 이럴 때는 '이런 인간도 있어' '이런 일도 있어'라고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걸까요." 사토루는 말한다. 사람들은 때로 익숙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존재가 부재로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은 '사랑할 때가 오지 않았을 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통념에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연애를 불변의 진리로 규정해버린 한국의 픽션과는 퍽 다른 모양새다.

'무성애'는 한국 사회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
 
 드라마 <런 온> 갈무리 사진.
ⓒ JTBC
 
2020년부터 다음 해까지 방영된 우리나라 드라마 <런 온>에 '무성애자', '무로맨틱'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근데 그때 분명 무성애자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 무로맨틱은 아니에요. 스펙트럼이 워낙 넓으니까." 몇 마디 대사에 대중들은 술렁였다. 무성애자라거나 무로맨틱이라는 말도 생소한데, 무성애자가 연애를 한다는 것도 상식으로 이해하기에 버겁다.

이런 성 정체성이나 소수자 문제에 이미 익숙한 혹자는 <런 온>의 장면이 '무성애자를 납작하게만 다뤘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절대 다수의 시청자는 무성애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조차 없는 상황이다. <런 온>에 단편적으로 등장한 몇몇 무성애 코드에 이리도 수많은 말이 얹어졌다는 것은 우리 미디어에서의 무성애 재현과 가시화 정도가 얼마나 처참한지를 방증한다.

A씨는 "사랑에는 많은 종류가 있고, 우리가 더 풍부한 감정을 나누고 있다는 걸 모두가 느꼈으면 좋겠다"며 그렇기에 가시화의 목소리를 멈출 수 없다고 전했다.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박진규 교수는 그의 책 <청춘, 대중문화로 말하다>에서 다양성에 대한 비유를 이렇게 적었다.

"다양성이 그저 커피를 고르는 것을 넘어 커피를 싫어하는 사람의 권리까지 포괄하는 다양성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커피를 거부하고 다른 음료수, 즉 보리차, 홍차, 인삼차, 생수 가운데 자신에게 잘 맞고 진짜 마시고 싶은 걸 허용하는 다양성이 필요하다."

사랑이 모두에게 똑같은 모양새일 수는 없다. 커피를 아메리카노로 통일해서 마시는 것보다는 카페라테, 바닐라라테, 콜드브루 중에 골라서 마시는 사회가 나을 테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은 것은 커피 말고 그냥 따듯한 차를 마시고 싶은 사람, 커피 자체를 마시고 싶지 않은 사람까지 신경 써주는 사회일 테다.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다는 사람에게 굳이 '왜 이 좋은 걸 먹지 않냐'고 말할 필요는 없다. 납득도 이해도 아니라, 그냥 그런 일도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관련기사]
- '연애' '섹스' 안 하면 안 되나요? http://omn.kr/21lxp
- "굳이 연애를 경험해봐야 할까요? 안 하고 싶어요" http://omn.kr/21s5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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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울여자대학교 바롬 졸업 프로젝트 팀 <에이슈>의 기사입니다. 김나현(저널리즘 전공), 임하늘(일어일문학과), 장혜윤(저널리즘 전공), 정다슬(디지털영상전공)로 구성돼 있습니다. '에이엄브렐라 가시화'라는 큰 주제를 축으로 활동합니다. 기획기사와 캠페인 활동을 통해 퀴어 내에서 소외받는 에이엄브렐라의 존재를 알리고 이를 통해 유성애 중심 사회 속에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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