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갗 아래

한겨레 2022. 12. 8.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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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에는 살갗이 들어가는 재미있는 숙어가 몇개 있다.

<러버스 록> 은 검은 살갗이 찢어지고 피 흘리고 아물어 가는 다른 에피소드들 아래서 너덜너덜해진 살갗을 회복시키는 살 역할을 한다.

그 밤이 지난 뒤 밝아오는 아침, 새 연인 마사와 프랭크가 자전거를 타고 어둠과 밝음 사이의 경계를 달려오는 시퀀스는 밤과 절연된 것이 아니라 밤이 낳은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밤과 아침이 솔기 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게 우리 살갗 아래로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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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러버스 록> 스틸컷.

[크리틱] 정영목 |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영어에는 살갗이 들어가는 재미있는 숙어가 몇개 있다. 자기 살갗 밖으로 뛰어나가면 너무 놀라거나 기쁜 것이다. ‘아이브 갓 유 언더 마이 스킨’(I’ve Got You Under My Skin)이라는 노래도 있듯이, 사람의 살갗 아래로 들어가면 화나게 하거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살갗이 개인의 안팎을 나누는 경계라서 그 아래로 들어가면 침해나 친밀 둘 중의 하나가 되는 듯하다. 집단에도 이런 살갗이 있지 않을까?

강렬한 영화 <헝거>(2008)로 유명한 영국 감독 스티브 매퀸의 <스몰 액스>(Small Axe, 2020)는 개인과 집단의 살갗이 맞붙고 파고드는 광경을 흥미롭게 탐사한다. 이 티브이시리즈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런던의 서인도제도 출신 이민자들(감독이 속한 집단), 그러니까 검은색 살갗 집단의 실화를 복원한다. 런던 경찰과 싸운 이민자 식당 이야기 <맹그로브>, 경찰에 대한 복수심을 경찰이 되어 풀고자 한 인물의 이야기 <레드 화이트 블루>, 고아 출신 떠돌이에서 작가로 성장한 인물의 이야기 <알렉스 위틀>, 난독증 소년이 교육기관에서 받는 차별 이야기 <교육> 등 네편 모두 수작인데, 그 중심에 1980년대 하우스 파티의 하룻밤을 그린 <러버스 록>이 있다.

<러버스 록>은 검은 살갗이 찢어지고 피 흘리고 아물어 가는 다른 에피소드들 아래서 너덜너덜해진 살갗을 회복시키는 살 역할을 한다. 살갗이라는 말 자체가 암시하듯, 밑에 살이 차 있지 않다면 살갗은 껍질에 불과할 것이다. 콘래드나 엘리엇이 “속이 텅 빈 사람들”에 절망한 게 벌써 백년 전이니 이제 그 속은 흔적 기관처럼 노스탤지어의 대상조차 될 수 없을 터인데, 1980년대에도 이 공동체가 여전히 집단적 속을 간직한 것, 게다가 2020년에 그것이 영화에서 소생한 것은 경이롭다. 살아 있는 속을 본 게 언제던가.

<러버스 록>은 젊은 여자 마사가 저녁 하우스 파티에 참석했다가 프랭크를 만나고 연인이 되어 아침에 함께 나오는 하룻밤의 이야기다. 끝에서 마사는 혼자 집의 침대에서 눈을 감았다 뜨기 때문에 이 ‘실화’를 마사의 꿈으로 읽어도 상관없겠다는, 나아가서 꿈이 외려 ‘실화’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살갗 아래서 벌어지는 일은 꿈과 마찬가지로 의식과 말이 함부로 다가서지 못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매퀸 감독은 수상쩍은 백인이나 경찰차가 상징하는 외부의 위협, 영화의 앞과 뒤에 등장하는 십자가 등을 통해 이 영역의 경계를 표시하는데, 이는 이 일이 꿈이라 해도 현실을 잊지 않은 꿈이라는 뜻인 동시에 이 일이 경계 안쪽에서, 살갗 아래 살 속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살 속의 파티는 남녀가 서로의 살갗 아래로 들어가 친밀에 이르려고 애쓰면서 점차 유동적인 생명체가 되고, 마침내 죽음과 폭력마저 녹이고 흡수해 들이면서 종교적 무아경과 방불한 상태에 도달한다. 그 핵심에는 재현 자체가 성취로 느껴지는 일종의 군무와 떼창 장면이 있다. 당시 레게 음악의 음과 양을 대표하던 러버스 록과 라스타파리안 두 장르가 연결되는 이 시퀀스들은, 훌륭한 재현이 보통 그렇듯이 설명은 거부하고 직접 경험하는 것만 허락하지만, 이들에게 사랑과 투쟁이 하나였음을, 그것이 말이 아니라 살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나머지 에피소드들이 결코 절망으로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보여주면서, 단지 실화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재생하는 경지로 올라선다.

그 밤이 지난 뒤 밝아오는 아침, 새 연인 마사와 프랭크가 자전거를 타고 어둠과 밝음 사이의 경계를 달려오는 시퀀스는 밤과 절연된 것이 아니라 밤이 낳은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밤과 아침이 솔기 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게 우리 살갗 아래로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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