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길] ⑨ 목숨 던져 연인 지킨 '순애보' 속 그 길...홍윤애를 그리는 '홍랑길'

제주방송 강석창 2022. 12. 8.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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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애, 연인 역모 누명 막기 위해 희생
홍윤애 그리는 '홍랑길'
홍윤애 관련 연극, 오페라 잇따라 제작
홍윤애 무덤이 있었던 곳에 생겨난 '홍랑길'


도로명 주소가 시행되면서 제주엔 '홍랑길'이란 길이 생겼습니다.

홍랑(洪娘).

홍씨 성을 가진 낭자, 홍윤애라는 조선시대 여성과 관련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홍윤애는 조선 정조시대 제주에 살던 향리의 딸이었습니다.

홍윤애의 아름답지만 아픈 순애보는 제주로 귀양온 연인 조정철을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조정철은 정조 시해 사건을 주동했던 집안의 사위였고, 역모죄로 귀양살이를 하게 됐습니다.

가문은 풍비박산이 났고, 아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27살 나이에 제주로 귀양 온 조정철은 절망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런 조정철의 수발을 들며, 살아갈 희망을 갖게 만든게 홍윤애였습니다.

'창작 오페라 홍윤애'에 등장하는 조정철과 홍윤애


귀양 온 조정철이 측은해 스스로 자원해 도와주려던 마음은 몰래한 사랑으로 커 나갔습니다.

시간이 지나 조정철과 홍윤애는 연인이 됐고, 조정철이 귀양온 지 4년만에 둘 사이에 딸까지 낳게 됐습니다.

하지만 둘의 행복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홍윤애가 딸은 낳은 다음달, 노론인 조정철의 집안과 원수지간이던 소론의 김시구가 제주 목사로 내려왔습니다.

김시구는 반대파인 조정철을 제거하기 위해, 죄가 될 만한 것을 찾느라 온갖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끝내 죄가 될 만한 정황을 찾아 내지 못하자, 홍윤애를 붙잡아 가혹한 추궁을 해 댔습니다.

조정철이 유배지 규정을 어긴건 없는지, 임금을 비방하진 않았는지 고문을 이어갔습니다.

'창작 오페라 홍윤애'의 한 장면


홍윤애가 끝까지 조정철의 무고함을 주장하자, 유배온 죄인의 집에 출입했다는 명목으로 곤장형을 가해 초주검에 이르게 했습니다.

홍윤애는 조정철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언니에게 마지막으로 절에 보내 숨겨 키우던 딸과 조정철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창작 오페라에 그려진 홍윤애


홍윤애의 희생 덕에 조정철의 무죄가 밝혀졌고, 거짓 사건을 꾸민 김시구는 파직됐습니다.

김시구를 제주 목사로 추천했던 이조참판까지 파직당했습니다.

조정철은 28년이나 더 귀양살이를 하다, 정조가 죽고 난 후 관직에 복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나의 환갑이던 1811년, 제주 목사를 자원해 제주로 돌아왔습니다.

홍윤애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지 31년만이었습니다.

홍윤애의 무덤과 조정철이 직접 세운 비석


제주에 도착하자 마자 그리던 딸을 만났고, 곧바로 홍윤애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홍윤애 무덤 앞에서 통곡하던 조정철은 연인 홍윤애를 그리며 비석을 세우고, 추모시를 묘비에 남겼습니다.

옥같이 그윽한 향기 묻힌 지 몇 해던가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하랴
황천길 아득한데 누굴 의지해 돌아갔을꼬
짙은 피 깊이 간직한 죽음 인연으로 남았네
천고에 높은 이름 열 문에 빛나리니
한 집안 높은 절개 두 어진 자매였네
아름다운 두 떨기 꽃  글로 짓기 어려운데
푸른 풀만 무덤 앞에 우거져 있구나.


조정철이 홍윤애를 그리며 쓴 시가 새겨진 비석 뒷면 탁본


조정철은 자신의 유배 생활을 기록한 문집에도 홍윤애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남겼습니다.

귤나무 우거진 성 남쪽 작은 무덤
젊은 혼 천년토록 원한 남으리
산초와 계향으로 빚은 술을 누가 올려줄까
한 곡조 슬픈 노래에 눈물 절로 흐르네

연인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 순애보의 주인공 홍윤애의 무덤이 있던 곳이 바로 홍랑길 부근입니다.

제주읍성 밖, 조정철이 머물던 집이 내려다 보이는 야산에 무덤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현재 홍랑길엔 홍윤애의 무덤이 없습니다.

홍윤애의 무덤이 있었던 자리에 들어선 표지석



홍윤애의 무덤이 있던 곳이라는 묘지석이 벚나무 옆에 초라하게 만들어져 있을 뿐입니다.

관심을 갖지 않으면 눈에 띠지도 않습니다.

홍윤애의 무덤은 세월이 지나 1940년 제주농업고등학교가 생기면서 자리를 내줘야했고,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로 옮겨졌습니다.

당시엔 홍윤애의 절절한 순애보가 알려져 있지도 않은 때라, 그저 오래된 무덤으로만 여겨졌습니다.

주택가 이면도로인 '홍랑길'


현재 홍랑길엔 사실 홍윤애와 조정철을 떠올린만한 흔적이 없습니다.

오래전 주택가가 만들어졌고, 주택가 이면도로에 홍랑길이란 신주소가 부여된 겁니다.

그러나 홍윤애의 순애보는 제주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홍윤애 무덤에서 매년 열리고 있는 추모행사


홍윤애를 추모하기 위한 추모 사업회가 만들어졌고, 매년 홍윤애 무덤에서 추모제와 함께 문화행사까지 열리고 있습니다.

홍윤애의 삶을 그린 창작 무용극과 연극이 만들어졌고, 얼마전엔 제주목관아에서 '창작 오페라 홍윤애'가 공연되기도 했습니다.

1997년 조정철의 후손인 양주 조씨 종친회에서도 홍윤애를 정부인으로 모시기로 했고, 그 이후 해마다 문중 사당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홍윤애 무덤 표지석이 있는 전농로엔 20~100년생 벚나무이 들어서 있다. 매년 4월 벚꽃 축제가 열린다.


홍윤애의 무덤이 있었던 제주시 전농로엔 수령 100년이 넘는 벚나무들이 지켜 서 있습니다.

그리고 매년 4월, 짧지만 아름다웠던 그녀의 순애보를 전하려는 듯, 화려하게 피어났던 벚꽃 잎들을 하염없이 흩뿌리고 있습니다. 

JIBS 제주방송 강석창(ksc064@naver.co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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