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왜 우리는 보이는 것을 믿는가

조성관 작가 2022. 12. 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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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경 촬영한 요셉 괴벨스의 가족사진 / 사진=위키피디아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며칠 전 신문 국제면을 읽다가 사진 한 장에 눈길이 갔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여성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그 사진에는 이런 제목이 붙었다.

<'참전병 어머니 위로' 연출한 푸틴>

푸틴 대통령은 '어머니의 날(11월27일)'을 앞두고 자신의 관저에 참전 장병 어머니 17명을 초대했다. 푸틴 대통령은 어머니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군인들의 죽음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특히 어머니가 겪는 고통은 더 크다는 걸 알고 있다."

이 사진이 어떤 배경에서 기획되었는지는 누구나 짐작하는 대로다. 전쟁의 장기화로 현재까지 러시아 병사 8만명 이상이 죽었다. 이에 따라 여론이 악화되자 그것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로 연출되었다. 언론이 통제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사진은 푸틴의 의도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

히틀러가 지시한 '가족사진'

이 연출 사진을 접하는 순간 아돌프 히틀러와 요셉 괴벨스가 동시에 떠올랐다. 히틀러의 오른팔로 홀로코스트와 여론 조작을 기획한 인물 괴벨스. 또한 괴벨스는 선전부장관이라는 막강한 권력으로 문화예술계를 주물렀다. 독일 최대 영화사 UFA를 손아귀에 넣은 그는 캐스팅부터 제작비까지 모든 것에 관여했다.

베를린에서 성공을 꿈꾸는 여배우들이 그의 눈에 들기 위해 줄을 섰다. 그중 한 사람이 체코 프라하 출신의 배우 린다 바로바. 그녀에게 주요 영화의 주연배우 자리가 돌아갔다. 독일어권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체코의 가족은 고급 저택에서 살게 되었고, 걱정 없이 돈을 썼다.

짐작하는 대로, 바로바는 괴벨스의 연인이었던 것이다. 거칠 게 없던 괴벨스는 대놓고 바로바를 자신의 별장으로 불러들였다. 권력 내부는 물론 독일 전역에 스캔들이 파다해졌다. 참다못한 그의 부인이 히틀러를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린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히틀러가 괴벨스를 불러 호통을 치며 이런 취지의 명령을 내린다.

"사실은 소문과 다르다는 걸 보여줘라. 부인과 사이가 좋고 화목한 가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진을 찍어 신문과 TV에 뿌려라."

1941년 어느 날 괴벨스는 부인 마그다, 2남 5녀의 자녀들과 활짝 웃는 사진을 연출했다. 맨 위에 있는 군복을 입은 청년은 괴벨스의 장남. 군 복무 중이라 그의 사진은 나중에 합성했다.

지난해 가을 번역 출간된 '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 영국 작가 줄리아 보이드는 히틀러 집권 기간(1933~1945) 중 독일을 여행한 외국인들의 일기, 편지, 언론 보도, 외교문서 등 각종 기록물을 분석하고 종합해 여행자의 눈에 비친 제3제국을 재현해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게 1933년. 히틀러는 관광이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효용가치가 높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관광산업을 활성화한다. 미국인과 유럽인이 독일로 쏟아져 들어왔다. 1937년까지 독일을 여행한 미국인은 연간 50만명에 이르렀다. 독일을 다녀간 이들은 교육 수준에 상관없이 한결같이 독일을 찬미했다.

외국 관광객들이 독일에 감탄하는 동안 나치는 유대인과 장애인을 탄압하는 정책을 펼쳤는데도 말이다. 관광객들은 (나치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보이는 것만 보고 독일을 판단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줄리아 보이드는 이 여행자들 역시 '나치의 공범자'라고 강조한다.

영화 '나우 유 씨 미 2'의 포스터 / 사진=네이버

마크 러플러와 제시 아이젠버그가 주연한 영화 '나우 유 씨 미'(Now you see me)는 속편까지 나온 마술사기단 이야기다. '나우 유 씨 미 2'는 이런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거짓말을 안 한다고 거짓말에 속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지요. '눈으로 보면 믿는다' 과연 사실일까요.>

그리고 'BELIEVE'라는 영어 동사가 나타난다. '믿다'라는 뜻의 이 영어단어에서 앞뒤 철자 두 개씩을 떼어내면 LIE가 남는다. 절묘하다. 그렇다. 인간은 눈앞에 보이는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 영화는 '보이는 것을 믿는' 인간의 본능을 이용해 벌이는 사기행각 스토리다.

말콤 글래드웰의 저서 '블링크' / 사진=교보문고

말콤 글래드웰의 '블링크'

'얇은 조각'(thin slicing)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이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인도계 미국 사회심리학자 날리니 암바디와 독일계 미국 심리학자 로버트 로젠설이 1992년 미국심리학 회보(Psychological Bulletin)에 기고한 연구논문에서다.

사람은 특정한 상황을 판단할 때 불충분한 정보로 빠르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불충분한 정보'가 '얇은 조각'이다. 인간관계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첫인상이 바로 '얇은 조각'에 기초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얇은 조각'에 더 의지한다는 것이 미국 심리학자 다나 R. 카니의 결론이다.

'얇은 조각'이라는 심리학 용어를 대중화한 것은 저널리스트 작가 말콤 글래드웰의 책 '블링크'(Blink)다. 이 책의 부제는 'The Power of Thinking Without Thinking(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힘)'이지만 번역본에서는 '운명을 가르는 첫 2초의 비밀'로 살짝 바뀌었다.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본 지 2초만에 판단하는가. 눈에 보이는 것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인류의 조상은 아프리카 초원에서 살아남아 전 대륙으로 뻗어나갔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그들은 눈앞에 나타난 동물이 맹수인지 사냥감인지를 순식간에 식별해야 했다. 1~2초 안에 판단을 내려야 했다. 그게 DNA로 이어져 내려와 '얇은 조각'이 되었다.

탄자니아 세렝게티 국립공원에서 이동 중인 누 떼 / 사진=위키피디아

유대계 독일 평론가이자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나치에 쫓기다 극단적인 선택한 인물이다. 벤야민에게는 '매체 미학자'라는 타이틀도 붙는다. 그는 일찍이 1920년대부터 사진, 영화, 회화, 신문, 라디오 같은 대중매체의 사회적 기능에 주목했고 번득이는 글을 남겼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다시 벤야민의 통찰을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그가 이미지의 힘을 누구보다 일찍 간파했다는 것이다. "이미지가 메시지다."

다시 괴벨스의 가족사진을 보자. 어린 딸들의 천진난만한 표정이 괴벨스의 악마성을 완벽하게 휘발시켰다. 이 사진 한 장으로 괴벨스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히틀러의 판단이 정확했던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인간 본성을 악용해 히틀러와 괴벨스는 독일인을 집단 최면에 빠트려 캄캄한 동굴 속으로 몰아넣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역사철학자 헤나 아렌트(1906~1975)의 명저 '전체주의의 기원'을 떠올리게 된다. 아렌트는 이렇게 강조한다. '히틀러가 죽었다고 전체주의가 사라지는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전체주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지금 보고 믿는 것은 진실인가. * 외부 필진의 글은 뉴스1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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