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 미국판 '날치기' IRA…현지에서 말하는 해법

남승모 기자 2022. 12. 8.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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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산 전기차에만 대당 최대 7천 5백 달러, 우리 돈 약 1천만 원의 보조금을 주도록 한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내년부터 본격 시행됩니다. 법 시행에 앞서 구체적인 시행 지침(guidance)을 마련하기 위해 미 재무부가 각국 정부와 기업 등 이해당사자들로부터 2차례 의견수렴을 진행했습니다. 보조금 지급 방식이 세액공제여서 재무부가 의견을 취합하긴 했지만 이해당사자가 각국 정부까지 망라돼 있어 실제 미 무역대표부와 상무부, 국무부, 백악관까지 해당 작업에 관여돼 있는 상태입니다.
 

미국에 뿔난 '동맹들'…외교 압박

미국 방문한 안덕근 통상교섭본부장 (사진=연합뉴스)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하위 규정, 즉 앞서 말씀드린 시행 지침이 올해 말 발표 예정이어서 각국 정부의 대미 교섭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와 국회 합동 대표단도 막판 교섭 차 현지시간 지난 4일 워싱턴을 방문했습니다. 미 의회와 행정부 주요 인사들을 잇따라 만나 우리 기업들의 이익 보호와 피해 최소화를 위해 전방위 외교전을 벌였습니다.

EU도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이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으로 인한 유럽 내 투자 유출 방지를 위해 국가보조금 제도 개편할 것이라고 밝히며 대미 압박 수위를 높였고, 바이든 정부 들어 첫 국빈 방문을 한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 역시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프랑스 업계 사람들에게 아주 공격적(super aggressive)이라고 공개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일본도 미국을 상대로 교섭 중이지만 일본 외교의 특성상 물밑 교섭 위주여서 겉으로 드러난 내용은 많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강력 반발하고 있는 국가들, 그러니까 앞서 말씀드린 한국, EU, 일본 등이 모두 미국이 평소 강조해온 '동맹'이라는 점입니다. 바이든 정부 들어 외교-안보는 물론 경제에서도 세계 무역 질서 재편과 공급망 구축 등 각종 분야에서 동맹과의 협력을 중시해왔다는 걸 감안하면 뭔가 꼬여도 단단히 꼬인 셈입니다. 또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보조금 조항이 WTO나 FTA 규정을 위반한 것이어서 미국 입장에서 딱히 반박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한 전문가는 WTO 제소 절차가 시간이 걸리고 실제 기능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미국이 각국으로부터 제소를 당하게 될 경우, (동맹이고 뭐고 별 신경 안 쓰던 트럼프 정부라면 모르겠지만) 바이든 정부 입장에서 마냥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동맹과 국제사회에서의 리더를 자처하는 미국이 국제 규범을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을 경우, 비록 명분상이라도 외교 무대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자충수, 원인은 졸속 '날치기'


그럼 '민주당 정권이 왜 이런 자충수를 둔 걸까?' 라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답은 '날치기'입니다. 미국 정가에서 이런 단어 사용에 동의할지 모르지만, 지난 8월 7일 미국 상원에서 가결된 법안이 불과 5일 만에 하원을 통과한 것만 봐도 상당히 이례적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민주-공화 50대 50이던 상원에서는 해리스 부통령이 캐스팅보터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원래 바이든 대통령의 공약사항이었던 '더 나은 재건법안'(BBB)을 수정한 것으로 그 논의 과정이 상당히 폐쇄적이고 또 졸속으로 이뤄졌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실제로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 의원들도 해당 법안 내용에 대해 제대로 숙지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후 기자 회견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조정이 필요한 작은 결함(glitches)"이 있다고 말하면서 "법안에 미국과 FTA를 체결한 국가는 예외로 하는 규정이 있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FTA가 아니라 동맹국을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즉, 그 어느 것보다 엄격해야 할 법 조문에 국가 간 조약인 FTA와 단순 동맹국이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구분해 넣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중간 선거를 앞두고 입법 성과를 내기 위해 법안을 일사천리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종의 '참사'인 셈입니다. 바이든 정부는 인플레이션 감축법 서명 6일 전 반도체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법에 서명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이런 성과들에 힘입어 물가 폭등과 에너지난 등으로 고전하던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이 반등하는 정치적 효과를 보기도 했습니다.
 

법 개정 어려운 이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사진=AP, 연합뉴스)

아무리 세계의 리더를 자처하는 미국 대통령이라고 해도 민주 국가에서 국내 정치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급하게 표심 공략을 위해 법안들을 통과시켰고 그 덕에 중간 선거에서도 상당한 덕을 본 것도 사실입니다. 미국 정부 입장에서 고민은 이제부터입니다. 졸속 처리된 부분을 조정해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째, 물리적으로 법 개정 자체가 어렵습니다. 이미 하원은 공화당에게 넘어갔으니 설사 법을 고치려 해도 민주당 정권 마음대로 고칠 수 없게 됐습니다. 둘째, 정치적으로도 법 개정은 쉽지 않습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바이든 정부가 내세우는 가장 큰 치적 가운데 하나인 데다 Made In Amerca라는 정책에 있어서 만큼은 공화당도 한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공화당이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손보겠다고 한 건 증세나 기후 환경 대응 같은 분야이지 Made In America가 아닙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결함을 인정하면서도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대해 미국도, 자신도 사과하지 않겠다고 밝힌 점이나 백악관이 "법률 수정을 위해 의회로 돌아갈 계획은 없다"고 브리핑한 걸로 볼 때 일단 법 개정은 요원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현재 각국이 제기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백악관과 재무부 등이 전방위로 나서 협상을 진행 중입니다. 그 핵심은 앞서 말씀드린 법 하위 규정인 재무부 시행 지침(guidance)이 될 걸로 보입니다. 시행령을 통해 최대한 동맹국 피해를 줄여보겠다는 건데 한계는 분명합니다. 법 체계상 법 조문에 명문화된 내용을 하위 규정이 벗어날 순 없습니다.

당장 우리 전기차 보조금 문제만 해도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북미 지역에서 최종 조립된 차량만을 전기차 보조금 대상으로 분류하고 있어 이를 하위 규정에서 조정할 여지는 많지 않아 보입니다. 따라서 이런 조항에서 예외인 상업용 전기차 조항을 넓게 해석하는 등 다른 대안도 모색하고 있지만 우리 요구 사항의 핵심은 '북미산 조립 조항 적용을 3년 유예'하는 것입니다. 현지 전문가들은 적용 유예를 하위 규정에 위임 조항이 법에 없어 이런 접근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분위기입니다.
 

현지에서 말하는 '해법'


하지만, 이에 대해 모든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정치적 의지'입니다. 상당한 부담을 져야 하지만 바이든 정부가 의지를 갖고 밀어붙이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과거 그런 전례도 없지 않다고 합니다. 법 테두리를 벗어나는 행정부의 이런 해석을 의회가 문제 삼지 않는다면 무리 없이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의원 외교가 중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미국도 국내 정치가 최우선입니다. 미국 자동차 업계에서 북미산 조항을 완화하는 이런 유예 조항을 결코 반길 리 없습니다. 또 우리야 3년 유예가 중요하지만 유럽연합이나 일본의 요구 사항이 우리와 같지도 않습니다. (각국이 정보 공유는 하면서도 아직 공동 대응이 나오지 않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미국이 우리나라만을 위해서 어디까지 나서줄지는 그래서 더욱 예단하기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 한국과 EU, 일본 등 동맹국들에게 내놓는 해결 방안을 보면 미국이 같은 동맹이라도 해당 국가를 어느 정도 비중으로 보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한 가지 척도가 될 걸로 보입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 시행 과정에서 EU보다 불리한 대우를 받진 않을 것이라고 밝힌 우리 방미 대표단의 말이 그대로 이뤄지길 바랄 뿐입니다.

남승모 기자smna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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