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소인의 세계’에 갇힌 실물경제 총괄 부처

세종=전준범 기자 2022. 12. 8.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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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산업통상자원부에서 낸 보도자료 하나가 주목받았다.

이창양 산업부 장관이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와 면담한다는 내용이었다.

산업부 장관과 한은 총재의 만남을 굳이 보도자료로 만들어 배포한 것도 낯설었지만, 눈길을 더 사로잡은 건 문서를 열었을 때다.

이창용 한은 총재와 이창양 산업부 장관의 만남을 알리는 보도자료 소동은 화이부동보다는 동이불화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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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준범 경제정책부 기자

최근 산업통상자원부에서 낸 보도자료 하나가 주목받았다. 이창양 산업부 장관이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와 면담한다는 내용이었다. 산업부 장관과 한은 총재의 만남을 굳이 보도자료로 만들어 배포한 것도 낯설었지만, 눈길을 더 사로잡은 건 문서를 열었을 때다. 첨삭 받은 원고처럼 내용의 절반 이상에 빨간 줄이 그어진 상태였다. 전체 글자 수와 비교해보니 초안의 60%에 이르렀다.

산업부는 처음 배포한 보도자료에 수정할 사항이 생기면 이런 식으로 원래 문장을 살려둔 채 다른 색깔로 선을 그어 기존 내용을 삭제하거나 새로운 내용을 추가한다. 어디가 바뀌었는지 알려주려는 의도다. 자료 수정은 흔한 일이다. 다만 이번처럼 절반 넘게 지우는 경우는 드물다. 온통 빨갛게 물든 자료에는 ‘이 장관과 이 총재가 소통을 잘하기로 했다’는, 하나 마나 한 내용만 덩그러니 남았다.

삭제된 문장은 ‘실물경제 총괄인 산업부 장관과 통화정책 수장인 한은 총재가 처음으로 공식 만남을 가졌다’는 의미 부여와 ‘이 장관이 이 총재에게 어려운 경기 상황을 설명했다’는 면담 내용, ‘두 사람이 경제정책 목표 달성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는 합의 등이었다.

이 자료에 빨간 줄이 그어진 건 산업부가 행사 이전에 배포한 보도자료를 한은에서 확인한 후 내용 삭제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한은이 문제 삼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장관은 “글로벌 경기 침체로 수출이 둔화되면서 기업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3고(高)로 채산성이 악화되고 있다”고 경제 상황을 평가하며 “대내외 여건의 불확실성 증대로 미래를 위한 기업 투자가 위축되고, 자금 확보의 어려움도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원자재 가격과 금리가 상승하면서 기업의 부담이 커진 점도 기업 활동을 제약하는 요인”이라고 실물경제 현장의 애로를 전달했다.

이 문장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한은이 아연실색하며 보도자료 수정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연속해서 올리고 있는 중앙은행 총재에게 금리 인상의 부작용을 지적한 것으로 보일 수 있어서다. 기업을 대변해 한은 총재에게 금리 인상에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주문하는 것으로도 읽히고, “경제 상황이 심각하니 협조하라”는 듯한 인상을 풍기기도 한다.

“성장·물가·금융안정이라는 경제정책 목표 달성을 위해 정책 당국들이 함께 노력하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대목은 중앙은행 독립성 침해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물가와 금융 안정’이라는 한은법 1조(설립 목적)에 산업부 입맛대로 ‘성장’을 끼워 넣었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경제부처와 중앙은행 간 소통은 중요하다. 자금시장 경색과 경기 침체에 대한 공포가 경제 시야를 흐릿하게 만드는 요즘 같은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소통과 만남이 월권과 간섭으로 비치면 곤란하다. 중앙은행의 역할과 실물경제 총괄 부처의 역할은 엄연히 구분돼야 한다. 빨간 줄이 그어진 산업부 보도자료는 정부가 중앙은행 위에 군림한다는 오해만 살 뿐이다.

공자는 논어 자로 편에서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고 했다. 군자는 다른 사람과 생각을 같이하지 않지만 그들과 화목하게 지낼 수 있고, 소인은 밖으로는 같은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이나 실은 화목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이창용 한은 총재와 이창양 산업부 장관의 만남을 알리는 보도자료 소동은 화이부동보다는 동이불화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실물경제를 총괄하는 산업부의 정책 스탠스가 소인의 세계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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