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의 맛 세상] 왜 ‘총각김치’일까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2022. 12. 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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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을 담갔다”며 처가에서 김치를 여러 통 보냈다. 통 하나를 여니 총각김치가 가득 담겨 있었다. 너무나 먹음직스러운, 새빨간 빛깔과 매콤 새콤한 냄새에 식욕이 동했다. 자제심을 잃고 맨손가락으로 총각김치를 하나 집어 앞니로 “또각” 베어 물었다. 갓 담은 김치 특유의 싱싱한 맛이 그만이었다. 일주일쯤 뒤 완벽하게 익은 총각김치를 따끈한 밥에 척척 얹어 먹을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

익숙해서 지나쳐 버리지만, 총각김치는 그 이름이 특이하다. 보통 김치는 주재료나 제법(製法)·형태적 특성에 따라 명명한다. 주재료에 따라 이름 붙은 김치로는 배추김치, 갓김치, 열무김치가 대표적이다. 만드는 방법과 형태적 특성에 따라 이름 지은 김치로는 보쌈김치, 깍두기, 나박김치, 물김치 등이 있다. 그런데 총각김치는 미혼 남성을 뜻하는 ‘총각’이라는, 김치와 별 상관 없는 단어가 붙었다.

/조선일보DB

한국음식인문학연구원 김홍렬 원장은 총각김치의 어원을 밝혀 보기로 했다. 조선시대 주요 음식서(飮食書)와 일제강점기 이후 1970년대 사이 발간한 조리서, 20세기 초 이후 국내서 발행한 신문, 1920년대 이후 창간한 여성 잡지 등 문헌을 샅샅이 뒤졌다. 그가 최근 자신의 논문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검색 결과 ‘총각김치’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최초 기록은 1959년 발간한 ‘여원(女苑)’이었다.

당대 최고 여성 잡지였던 여원은 김장철인 11월호에 ‘김장에 관한 백과’라는 8쪽 분량 김장 특집을 실었다. 이 특집 기사의 둘째 페이지 ‘재료의 선택과 구입’ 항목에서 “손이 가지만 ‘총각김치감’이 있다. 아주 서민적이고 애교 있는 김치로 한겨울에 손에 들고 어적어적 먹는 시원한 맛은 겨울이 아니면 얻을 수 없다”며 처음으로 총각무와 총각김치를 언급했다.

이후 총각김치는 언론에 거의 언급되지 않다가 1964년 갑자기 빈번하게 등장한다. 1964년 한 해에만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세 신문에서 총각김치·총각무를 언급한 기사가 69건이나 나온다. 특이한 건 문화·생활면이 아닌 연예면이나 영화 소개 기사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 해 8월 영화 ‘총각김치’가 개봉했기 때문이다.

사극으로 이름 날리던 장일호 감독이 연출하고, 당대 최고 청춘 스타였던 신성일과 엄앵란이 주연을 맡았다. 서영춘, 김희갑, 김승호, 트위스트 김 등 유명 배우들도 함께 출연했다. 영화 주제가 ‘총각김치’는 유명 작곡가 이봉조가 작곡하고 인기 가수 현미가 불렀다. 영화는 ‘청소년 입장 불가’ 등급임에도 서울에서만 10만 관객을 동원하는 등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에서 총각김치는 ‘돈 많고, 좋은 학교 나오고, 외국 다녀오고, 잘생긴 미혼 남성’을 가리키는 은어로 나온다. 한국영상자료원에 보존된 심의 대본을 보자.

# 1. 미숙의 집 마루

(밥상 앞에 앉은 미숙, 젓가락으로 큼직한 총각김치를 집어 들고 감정이나 하듯 이리저리 보더니 싱긋 웃고 카메라를 향해서)

미숙 : 언니 이거 말야, 꼭 그거 같지? 호호….

윤숙 : 처녀 애가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미숙 : 괜히 오버센스야! 총각김치는 요새 미혼 남성에 대한 대명사야.

윤숙 : 대명사?

미숙 : 싱싱하고 이해심 많고 스마트하고 거기다 외국까지 다녀온 돈 많은 남성을 총각김치라고 부르거든.

김 원장은 “1950년대 말, ‘장가 안 간 성인 남자의 성기(性器)’라는 뜻을 담은 은어였으나 점잖은 시대에 맞게 겉으로는 ‘총각의 머리 모양’이라 위장돼 떠돌던 총각김치는 인기 절정 스타 커플이 등장한 동명(同名) 영화와 정상급 가수의 노래를 통해 ‘킹카’로 포장됐고, 중의적 의미와 스토리를 담아 급속하게 전파됐다”고 했다.

영화와 노래가 인기를 얻으면서 ‘총각김치’는 이미지 전환에 성공하며 일상 용어화했고, 마침내 ‘알타리무’와 ‘알타리무김치’라는 원래 명칭을 밀어내고 표준어로 1988년 자리 잡는다. ‘고유어 계열 단어가 생명력을 잃고 그에 대응하는 한자어 계열 단어가 널리 쓰이면, 한자어 계열 단어를 표준어로 삼는다’는 국립국어원 표준어 사정 원칙에 따른 것이다.

총각김치처럼 오래된 듯 보이는 음식이 생각보다 역사가 짧고, 그 이름도 영화와 노래를 통해 확산됐다니 새삼 놀랍다. 한국 음식과 식문화가 얼마나 역동적인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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