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공감하라→분석·종합하라→경우의 수를 상상하라

입력 2022. 12. 8. 00:40 수정 2022. 12. 8.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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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란 무엇인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많은 경우, 이해란 공감을 뜻한다. 그러기에 “난 널 이해해”란 말은 위로가 된다. 누구에게도 공감받지 못해서 외롭던 처지라고 해보자. 누군가 저 말을 해주면, 협착 상태에 있던 자아는 활짝 기지개를 켠다. 나는 나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었구나. 다른 사람 속에도 내가 있구나. 이처럼 이해란 타인과 내가 잠시나마 하나 되는 체험이다.

“난 널 이해해.” 혹은 “난 널 알아.” 이 말은 상처도 된다. 날 이해한다는 타인의 말이 나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는 선언일 때, 나는 발가벗겨진 느낌이 들 수 있다. 이어서 그가 나에 대한 단정적인 평가를 일삼을 때, 그가 말하는 이해는 더 이상 공감이 아니다. 대체 누가 단정적인 평가를 남발할 정도로 한 인간을 잘 알 수 있단 말인가.

「 인간과 세상은 선악 섞인 비빔밥
깊고 넓은 이해는 간단하지 않아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겸손 필요해
섣부른 평가 남발하는 일 없어야

“난 널 알아”에 담긴 오만과 편견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섣부른 평가를 남발하는 것은 대상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평가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 상대를 땔감으로 태우는 일에 불과하다. 단정적이고 섣부르게 내뱉는 “난 널 알아.” 이것은 상대에게 공감을 표시하는 일이라기보다는 비뚤어진 자기 내면을 드러내는 일에 불과하다. 연약한 내면에 간신히 봉인해 놓았던 불안, 적의, 시기, 독두꺼비, 미친 흑염소, 흑염룡 같은 것이 기회를 틈타 질질 흘러나오는 것에 불과하다. 그때는 되물어라. 당신, 날 알아요? 날 정말 이해해요?

깊고 넓은 이해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덕목은 겸손이다. 권력자 앞에서 예예거리는 것이 겸손은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는 것이 겸손이다. 남들은 다 한심하게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남들이라는 건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남들에 불과하다. 남들은 다 꿀 빨며 공짜 인생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남들이라는 건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남들에 불과하다. 진짜 남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상대를 아직 잘 모른다는 인지적 겸손이 우선이다.

상대에 대한 무지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깊고 넓은 이해로 나아갈 수 있을까. 먼저 상대를 이루고 있는 부분들을 판별한다. 자신이 비난하고 싶은 상대의 약점만 보지 말고, 자신이 숭배하고 싶은 상대의 장점만 보지 말고, 상대를 이루고 있는 장점과 약점을 두루 판별한다. 상대를 순수한 악인이라고 단정하고 싶은 나머지 상대의 약점만 보아서는 안 된다. 당신이 경멸하는 정치인이라고 해서 오로지 단점만 있겠는가. 상대를 순수한 선인이라고 단정하고 싶은 나머지 상대의 장점만 보아서는 안 된다. 당신이 좋아하는 정치인이라고 해서 오로지 장점만 있겠는가.

순수한 악인, 순수한 선인 없어

상대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부분들을 판별했으면, 이제 그 부분들 간의 관계를 생각한다. 이해라는 것이 꼭 대상과 나의 공감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란 나누어진 부분들 간의 관계를 파악해 낼 때도 쓰는 말이다. 자신이 순수한 악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의외로 보이지 않는 선행을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고 치자. 그 사람이 미운 나머지 그 사실을 도외시하면 곤란하다. 악행과 선행이 어떻게 동시에 가능한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양자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상대의 일면만 보고 곡해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결국 순수한 악인이나 선인은 유니콘처럼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현실 속의 인간은 선과 악의 비빔밥이다. 사람마다 밥과 나물의 비율이 좀 다를 뿐. 참기름과 계란지단의 함량이 좀 다를 뿐. 이 비빔밥적 진실을 도외시하고 선악의 이분법에 매이면, 끝내 그 상대의 진면모를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단순한 기준으로 잘 재단되지 않는 복합적인 인간을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어, 생각보다 복잡하군! 이 깨달음과 더불어 단순하기 짝이 없던 자신의 기존 이해는 어느덧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때가 바로 지적 겸손이 깃드는 순간이다.

자신의 기존 견해가 틀렸음을 인지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한때나마 자신이 바보 같았다는 사실을 자인하는 일이며, 심리적 매몰 비용을 감당하는 일이다. 그 고통을 감내하고 흩어져 있던 다양한 부분들 간의 관계를 마침내 찾아내면, 그 고통을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는 희열이 온다. 일견 드러나지 않던 저변의 관계를, 흩어진 조각들을 잇는 연결점을 찾아내는 순간 고도의 지적 쾌감이 느껴진다. 뉴욕에서 벌어지는 일과 가리봉동에서 벌어지는 일이 사실 연결되어 있었다니! 북유럽 날씨와 한국의 매미 울음소리가 서로 연관되어 있었다니!

한가함과 무료함의 큰 차이

누군가 조각나 있는 대상들을 연결하면 경탄을 금할 수 없다. 그는 비약적인 상상력이 있어! 그래서일까. 세상의 철리를 깨달은 것처럼 구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식의 주장을 하곤 한다. 자신은 그 연결을 파악할 수 있기에, 이 세상 모든 것에 모르는 것이 없다는 식으로 말하곤 한다. 원융(圓融), 무애(無礙)), 활연관통(豁然貫通) 같은 표현들이 남발된다. 그러나 연결이 항상 능사인 것은 아니다. 연결 혹은 종합 능력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분석 능력이다. 대충 하나로 뭉개서 다루던 것의 부분 부분을 잘 발라내어, 이것과 저것은 별개 문제라고 나누는 것이 바로 분석의 좋은 예이다.

썰렁한 유머로 가득한 와야마 야마의 만화 『여학교의 별』의 한 장면을 보자. 고등학교 교사 호시가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자, 주변에서 말을 건넨다. “한가하시네요.” 호시는 큰 오해라도 받은 것처럼 반박한다. “한가하지 않아. 무료함을 달래느라 바빠.” 호시 선생은 한가하다! 그러한 과감한 평가는 호시 선생을 이해하고 있다는 자신감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그 이해는 잘못되었다. 한가함과 무료함이 별개 사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호시 선생이 아무리 무료해 보였어도, 그를 한가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호시 선생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자신은 지금 무료하기는 하지만, 그 무료함하고 싸우느라 바빠 죽겠는데, 상대는 자신을 한가한 사람 취급을 한 것이다.

허무와 성실은 별개 사안

나는 얼마 전에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을 펴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로부터 허무하니까 성실하게 살 필요 없다는 취지의 주장을 한 것으로 오해받았다. 인생이 허무하니 대충 살자는 냉소적 주장을 한 것이로군! 이러한 과감한 평가는 그 책을 꼼꼼히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인생에 허무한 측면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성실하게 살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허무와 성실은 별개 사안이다. 그것이 별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인생이 허무하니까 성실하게 살 필요 없다고 서둘러 결론 내리게 된다.

그런 섣부른 결론을 피하려면, 허무하냐 여부와 성실하냐 여부가 별개 사안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분석이다. 남들이 대충 뭉그러뜨려서 혼동하는 사안에 대해, 날카롭게 사안을 분석해보라. 사람들은 예리하다고 감탄할지 모른다. 허무하냐 여부와 성실하냐 여부를 나누어 보아야, 허무와 성실을 어떻게 연결할지 문제를 새삼 고민해볼 수 있게 되고, 그 연결논리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임을 알게 된다. 그 여러 가지 연결논리를 상상하고, 그 여러 선택지 속에 대상을 놓을 줄 아는 것이 또 다른 의미의 이해이다.

실로 허무와 성실을 연결하는 경우의 수는 하나가 아니다. 첫째, 인생은 허무하지 않으니 성실하게 살자. 둘째, 인생은 허무하지 않으니, 불성실하게 살자. 셋째, 인생은 허무하므로 불성실하게 살자, 넷째, 인생은 허무하므로 성실하게 살자. 다섯째, 인생이 허무함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게 살자..., 허무와 성실을 연결하는 경우의 수는 계속 늘어난다. 이러한 여러 선택지 중에서 나는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인생의 허무와 성실한 삶은 얼마든지 양립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분노와 혐오를 줄이는 길

이 정도만 해도, 인생은 허무하니까 막살아버리자는 식의 오해로부터 멀리 떠나왔음을 알 수 있다. 인생이 아무리 허무해도 인간은 성실하게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이다. 혹은 인생이 허무하기 때문에 비로소 성실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즉 인생의 허무와 성실한 삶이 양립 가능하다고 해도, 그 양립 가능의 논리는 다양하다. 인생이 허무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인생이 허무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것은 정말 흥미로운 문제이다.

인생은 과연 허무한 것일까. 이것은 상당 부분 경험적인 질문이다.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보고, 살아본 결과 과연 허무한지 아닌지를 답할 수 있는 문제이다. 인생이 허무하다고 해도 그 함의는 단순하지 않다. 그 함의를 음미하려면, 인생을 보다 깊고 넓게 이해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대상에 공감하고, 대상의 각 부분을 분석하고, 분석된 부분들 간의 관계를 상상하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확인하고, 부분들이 모여 이루는 종합적인 양상을 그려볼 수 있어야 한다. 깊고 넓은 이해를 얻기 위해 이런 어렵지만 흥미로운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어느덧 상대에게 가졌던 분노나 혐오도 많이 누그러져 있을 것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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