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찾기 위한 청소년들의 치열한 고민 [책방지기의 서가]

입력 2022. 12. 7.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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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소현·황나영·박춘근 지음, '여학생'
편집자주
'문송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건 인문학적 교양입니다. '문송'의 세계에서 인문학의 보루로 남은 동네책방 주인들이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책방에서 200m 거리에 고등학교가 하나 있다. 매일 아침 청소년들이 등교하는 시간쯤 나도 그 학교를 지나 책방으로 출근한다. 학교가 보이는 언덕길을 천천히 올라 신호등 앞에 대기하고 서 있으면 아이들이 차 옆을 지나 학교로 들어간다. 같은 옷을 입은 아이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10대들의 삶을 가늠해 본다. 매일 그들의 곁을 지나치면서도 아는 것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던 그 나이의 삶을.

청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이 희곡집을 읽고 너무 좋아서 책방의 정기구독 도서로도 선정했던 이유는, 이 책이 비단 어른들뿐 아니라 청소년들에게도 다양한 삶의 모습과 고민이 똑같이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희곡집 '여학생'에 실린 희곡들은 국립극단 소극장에서 2016년에서 2017년에 걸쳐 초연됐던 작품들이다. 대사와 지문으로 이뤄진 희곡이기에 읽는 동안 상황이 펼쳐지는 배경과 대화를 나누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주인공은 모두 여자 청소년들이다. 여자 청소년들은 너무나 쉽게 폭력과 억압에 노출되고, 피해자의 위치에 놓이며, 함부로 판단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충분히 드러내고 말해왔는가를 질문하게 되는 글이다. 책에 실린 세 편의 글의 주인공들은 오랜 시간 동안 지워졌던 존재들이며, 폭력과 지배 아래 몸과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성장하느라 애쓴 존재들이다. 친구가 없는 아이와 말이 없는 아이가 친구가 되어 훌쩍 떠나기도 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가며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고민하기도 한다. 그냥 학생이 아닌 '여학생'으로 통칭되는 그들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도, 괴짜도 아니며 그저 타인에 의해 정의받기보다는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은 한 존재일 뿐이다. 30여 년 전 나를 통과한 이야기이며, 지금 그 나이를 사는 나의 딸들의 이야기이며, 내가 매일 출근길에 보는 수많은 뒷모습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좋은 결과와 원하는 진학으로 이어지지 않는 청소년의 이야기는 실제의 삶에서는 자주 외면받는다. 청소년기를 성인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온전한 '나'로 존재하려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더욱 작고 초라해진다.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한 명 한 명의 삶 속에는 얼마나 다채롭고 총천연색인 이야기들이 자리 잡고 있을까.

오랫동안 학교 밖 청소년으로 지낸 딸아이가 해가 바뀌면 고등학교에 간다. 학교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아이를 보며 이 책을 손에 쥐고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무대로 소환해 보았다. 일그러진 표정, 우는 얼굴, 깔깔대며 웃던 순간, 외로워하던 모습과 잠잘 시간도 없이 애쓰던 날들. 이제는 지나가버린, 돌릴 수 없는 날들을 내가 만든 무대 위에서 다시 만난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도, 자퇴한 아이도, 다만 자기 앞의 놓인 하루의 생을 살아가는 아이도 모두 똑같이 애쓰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보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떠올려본다. 경쟁이 심화한 사회에서 한층 더 고된 삶을 살아가는 뒷모습들은 서로 비슷한 옷을 입고 있지만 더는 똑같아 보이지 않는다. 각자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드러나고 박수받는 이야기들이 마치 모두의 이야기인 것처럼 소비되는 세상에서 말 못 하고 홀로 고민하는 아이들이 없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침묵하던 이야기들은 더욱 말해져야 하고, 숨어 있던 이야기들은 더욱 쓰여야만 하겠다. 그런 이야기들이 쉽게 무대에 올라오는 세상에서 아이들이 살아가기를 바란다.

내가 매일 지나치는 뒷모습의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학교에서 가까운 한적한 골목에 작게 자리 잡은 우리 책방의 존재를 알지 못할 테지만, 나는 생각한다. 어느 날 문을 열고 청소년이 들어온다면 꼭 이 책을 추천해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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