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떳다 보아라 비행기~", 100년 전 항공우주 꿈 뿌린 안창남

2022. 12. 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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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학창시절 비행학교 졸업 후 자격증 취득 조선인 최초 日오사카 장거리 비행 성공 식민지 시절 국민에게 '飛上' 꿈 심어줘 가보지 않은 길 개척·선구자 역할 부상

"떳다 보아라 안창남(安昌男)의 비행기~"라는 노래까지 남긴 안창남은 그 시대 사람들에겐 '공중의 용사'였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로 식민 치하의 한국인에게 환희와 자긍심을 선물했다. 월드컵에 출전한 대한민국 태극전사들이 국내외 암울한 뉴스에 우울해 있던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 것과 같은 장거(壯擧)였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지금도 안창남의 비행기는 여전히 하늘을 날고 있다.

1922년 12월 5일 남대문역에서 수만 군중이 모여 환호성을 질렀다. 12월 3일 동경을 떠나 부산을 거쳐 이날 저녁 남대문역에 도착할 예정인 안창남을 기다리는 인파였다. 1922년 12월 7일자 동아일보에 당시의 광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두어 시간 전부터 남대문역의 넓으니 넓은 마당에 들어찬 수만 군중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각 단체들이 높이 든 환영의 깃발은 저녁 바람에 날리고 수천 학생의 정성을 모은 환영의 등불은 때아닌 꽃밭을 이루었다. 조용한 불빛에 화환(花環)이 빛나고 웅장한 음악에 장내가 뒤집히니 실로 전에 없던 대성황이라. 우리의 용사 안(安) 군을 비롯하여 방정환(方定煥) 씨 등 일행을 태운 기차는 한 시간 연착으로 8시 50분에야 하늘이 무너질듯한 만세 소리가 일어나는 남대문역에 도착하였다."

이 남대문역은 안창남에겐 어떤 곳이었나.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안창남이 19살 먹던 해 봄에 계모가 집을 판 돈 3천원을 훔쳐서 '나는 멀리 가서 불효를 끼치려니와 누님들이나 내 대신 틈이 있는 대로 부모 산소에 가 보시오. 나는 이제 공부하기 위하여 외국 길을 떠나니 언제나 와서 뵙게 될는지 모르겠오. 5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모르니 내 염려는 말고 잘 계시오'하며 누이와 눈물로 헤어졌던 곳이 바로 그 남대문역이다."

1921년 5월 5일자 매일신보는 도일(渡日)이후 안창남이 어떤 행보를 걸었는지 소개한다. "일본 오사카로 간 안창남은 먼저 자동차 학교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아주 훌륭한 운전수의 면허장을 얻고 더욱 기계 조종에 취미가 생겨 이에 조선인이 아직도 생각지 못하는 하늘을 정복하는 비행가가 한번 되어 보겠다고 뜻을 두고 그 이듬해 1920년 8월에 다대한 자신(自信)과 포부를 가지고 소율(小栗)비행학교에 입학해 석 달 만에 100마일의 졸업비행을 하여서 훌륭한 졸업증서를 받고 이 비행학교의 조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명을 잃을 뻔한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1922년 4월 22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안창남 비행기에서 추락'이란 제목의 기사다. "안창남 씨는 지난 19일 오후에 30미터의 상공에 올라갔을 때에, 갑자기 비행기 발동기에 고장이 생겨 급전직하(急轉直下)로 떨어지며 기체는 두 조각으로 산산이 분쇄되고 조종하던 안창남 씨는 신체의 여러 곳이 찢어져 2주일 이상의 치료를 요하는 중상을 당하였다 하고…(중략)"

이후 안창남은 2등 비행사 자격을 획득했고, 조선인 최초로 장거리 비행에 성공한다. "동경-오사카 간의 우편 비행을 거행하는 제4일 되는 11월 6일 용감한 22세의 조선인 비행가 안창남 씨는 고장이 있는 비행기를 수리해 가지고 기어코 처음 뜻을 이루고자…(중략)…험악한 1,400리의 공중을 무사히 돌파하고 오사카에 도착하여 조선 사람 비행가로 최초의 장거리 비행에 성공하였더라." (1922년 11월 8일자 동아일보)

그의 쾌거에 동아일보사 주관으로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 후원회'가 결성됐다. 신문에는 대대적 후원 광고가 실린다. 1922년 12월 2일자 동아일보 광고 기사다. "우리 조선 초유의 장쾌한 일인 안창남 군의 고국 방문 비행을 원조하기 위하여 발기된 본 후원회에서는, 13도(道)의 유지 제씨가 회원되시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회비 2원 이상을 내시면 통상회원, 10원 이상을 내시면 특별회원, 50원 이상을 내시면 명예회원이 되십니다."

후원회의 목표는 비행기 살 돈 1만5000원과 기타 부속품 값 5000원을 합쳐 2만원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모 유력자 한 사람이 5000원을 내면서 목표액은 달성되었다. 이렇게 후원금은 낸 분 중에는 이런 분도 있었다. "군산부 양화정 김병선(金秉善) 씨는 이번 우리 민족의 초유 항공가인 안창남 군이 고국 방문 비행을 행함에 대하여, 만분의 1일이라도 그를 후원하기 위하여 특히 12월 1일부터 말일까지 금연(禁煙)하고 매일 연초 대금으로 20전씩을 저축하여 동정하기로 하였다더라." (1922년 12월 18일자 동아일보)

이렇게 온 국민의 정성과 후원 속에 드디어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이 1922년 12월 10일 여의도에서 실행되었다. 1922년 12월 11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그날은 마침 엄동(嚴冬)일 뿐 아니라 경성에는 3곳의 산악(山嶽)이 있어 평시라도 비행하기가 극히 곤란했지만 비행은 강행되었다…(중략)…남산을 넘어서 경성 시중(市中)에 들어와서는 기계 전면의 '푸로페라'를 돌리는 바퀴 축에 넣은 기름이 얼어서 바퀴의 돌아가는 수효가 매우 줄어서 비행기는 몸을 지탱할 힘을 잃게 되고 북악산, 인왕산에서 내리 밀리는 모진 바람은 비행기를 나뭇잎 흔들 듯하여서 창덕궁에게 경의(敬意)를 표하고 동대문 방면으로 향하며, 몇 장의 '인사 말씀'을 박은 종이를 던질 때에는 비행기가 거의 떨어지는가 하였다."

마침내 12월 13일 오후 그는 경성-인천 왕복 비행에 성공한다. 1922년 12월 14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자. "13일 오후 4시 24분에 여의도의 하늘에 높이 뜬 '금강호'는 머리를 햇발이 어린 서쪽 하늘로 향하니 드디어 구름 가운데 형체를 감추었다.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시계만 보면서 빨리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시계의 바늘이 4시 55분을 가리킬 때에 멀리 영등포 하늘에 깔린 구름을 쏜살같이 헤치고 기다리던 '금강호'는 제비 같이 날아드니…(중략)…'금강호'의 찬란한 모양은 너무나 아름다워 보기에 눈이 부실 듯이 황홀하였다."

암울했던 시절에 온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었던 안창남. 그는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개척한 선구자(先驅者)였다. 갈등만 가득한 이 추운 겨울에 따뜻한 한 줄기 햇살 같았던 그 분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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