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살에야 ‘무죄’…3살 아기와 잡혀간 나, 거짓 자백을 했다

허호준 기자 2022. 12. 7.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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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화춘(95) 어르신 4·3 직권재심서 무죄
또래 여성의 품에서 숨진 갓난아기를 봤다
온 몸이 떨렸다, 나도 아기를 안고 있었다
고문 끝에 “산폭도 도왔다고 거짓 진술”
6일 오후 제주지방법원에서 증언하는 4·3 수형 생존자 박화춘 할머니. 허호준 기자

“무시건 허잰 애기들신디 이 말 고라져신지 모르쿠다. 잘못 고라져수다. 이추룩 애기덜 직원덜 고생시킬 거민 곳지 안헐 건디 고라져수다.” (뭐 하려고 자식들한테 (4·3 때 당했던)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잘못 얘기했어요. 이렇게 자식들, 법원 직원들 고생시킬 거였으면 얘기하지 않았을 텐데 얘기해버렸네요.)

내란죄 증거는 고작 ‘보리쌀 두되’

백발의 박화춘(95)이 6일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 증언석에 앉았다. 고령 탓에 귀는 잘 안 들렸지만 74년 전 기억은 또렷했다. 박화춘은 제주 출신 젊은이들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제주어(제주 방언)로 당시 상황을 마치 어제 일처럼 증언했다.

두려웠다. 또다시 잡혀가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자신 때문에 3남2녀 자식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숨죽여 살아온 세월이었다.

무서웠다. 형무소(교도소) 갔다 온 것만으로도 이미 ‘폭도’가 돼버린 상태에서 또다시 잡혀갈까 무서웠다. 무서워서 억울하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사람들을 피해 다닌 세월이었다.

창피했다. 경찰에 끌려가 거꾸로 매달려 고문을 당했다. 이 사실을 자녀들이 알게 될까 부끄러웠다. 입을 굳게 닫고 견뎌온 세월이었다.

4·3에 대한 박화춘의 기억은 두려움과 무서움, 창피함이 뒤섞여 있었다. 여전히 그는 자신이 4·3 피해자라는 사실을 꺼내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대통령이 4·3 추념식에 참석해 사과하고, 이웃들이 ‘4·3 유족’이 되기 위해 피해 사실을 신청하고 ‘보상금’을 이야기할 때도 입을 꾹 다물었다.

4·3 수형 생존자 박화춘 할머니가 6일 오후 제주지방법원에서 아들 윤창숙씨의 도움으로 증언하고 있다. 허호준 기자

그런 박화춘이 세상에 나왔다. 증언석 옆에 앉은 아들 윤창숙(66)씨의 도움으로 진술을 이어갔다. 박화춘이 아들에게 자신이 4·3 수형인이라는 사실을 알린 것은 올해 4월이다.

“밭에서 일하는데 외출 나갔다 돌아온 어머니가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갑자기 4·3 때 (형무소) 가서 살다 나왔다 하시더라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왜 이제야 말씀하시냐’고 여쭸어요. 그 전에는 조카들이 와서 4·3 때 집안에 희생된 친척들이 있느냐는 물음에 어머니는 언제나 손사래를 치며 없다고 하셨거든요.” 윤씨의 말이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윤씨는 제주도청을 찾았다. 그곳에서 윤씨는 어머니가 1948년 12월 군법회의에 넘겨져 징역형을 받은 사실을 확인했다. 어머니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수십년 가슴속에만 묻어둔 진실이었다.

4·3 당시 서귀포시 강정마을 옆 월산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하나둘 붙잡혀가자 20대 초반의 박화춘은 강정마을의 어머니 밭에 숨어 살았다. 잡히면 죽는다고 생각했다. 군경은 하루가 멀다 하고 동네 청년들을 잡아갔다. 어머니가 사람들 눈을 피해 몰래 가져다주는 밥을 먹으며 며칠을 버텼다.

“경찰이 죽은 아이를 쓰레기통에 버렸어”

1948년 12월15일 한밤, 제사를 드리러 큰아버지 집에 가던 길이었다. 길에서 만난 누군가 “여기서 살 수 없으니 따라오라”고 했다. 그의 안내를 받아 산속 굴에서 며칠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총을 든 토벌대가 들이닥쳤다. 굴에 살던 사람들은 모조리 연행됐다. 무자년(1948년) 겨울 한라산에는 어른 무릎이 빠질 정도로 많은 눈이 내렸다.

박화춘은 인근 호근리사무소로 끌려갔다가 서귀포경찰서에서 며칠을 지낸 뒤 제주경찰서로 이송됐다. 박화춘이 탄 트럭에는 붙잡혀 온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가 뒤섞였다. 20대의 박화춘은 품에 세살배기 아기를 안고 있었다.

6일 오후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린 4·3 직권재심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가족들과 법정을 나서는 박화춘 할머니. 허호준 기자

경찰서 취조실에서는 고문을 받는 사람들의 신음이 온종일 끊이지 않았다. 박화춘 차례가 됐다. 경찰은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박화춘을 취조실 천장에 거꾸로 매달았다. 갖은 고문이 뒤따랐다. 박화춘은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하라니 미칠 지경이었다”고 회고했다.

경찰은 “바른말을 하라”며 매질과 고문을 이어갔다. 견디다 못한 박화춘은 결국 “‘산폭도’에게 보리쌀 두되를 줬다”고 말했다. 거짓 자백이었다. 경찰은 곧바로 박화춘을 군사재판에 넘겼다.

1948년 12월26일 ‘내란죄’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무시무시한 죄목의 증거가 고작 ‘보리쌀 두되’였다. 같이 수감될 제주 여성들과 함께 목포로 갔다가 전주형무소로 이송됐다. 그곳에서 박화춘은 제 또래 여성의 품에서 숨진 갓난아기를 봤다. 경찰은 죽은 아이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바로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온몸이 떨렸다. 박화춘도 세살배기 딸을 안고 있던 터였다.

전주형무소에서 8개월을 산 뒤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다. 이감 전 한 보육시설에 아기를 맡겼다. 박화춘은 수형 생활을 하다 모범수로 분류돼 60일이 감면됐고 이듬해 8월26일 석방됐다. 귀향하는 길에 딸을 찾아 데리고 왔다.

초등학교 2학년 증손자까지 4대가 함께 듣다

그때부터 박화춘은 귀 막고, 눈 막고, 입을 막으며 살았다. “수형 생활 이야기를 누구한테 할 수 있겠어? 아기들이 피해를 볼까 봐 남들이 시국(4·3) 이야기할 때도 입 닫고 있었어. 무섭고 창피해서 억울한 생각도 없었어. 그냥 사람들 눈길을 피하고, 마주치지 않으려고만 했어.”

박화춘은 자신이 4·3 수형 생존자라는 사실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지금도 자식이나 손자들한테 피해가 돌아갈까 봐 두렵다.

“괜히 이야기한 것 같아.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아 미안하고, 옛날 기억을 다시 꺼내니 무섭고 창피해.”

법정에 나온 아들 윤창숙씨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어머니는 4·3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으셨다. 오늘 재심으로 어머니의 명예회복이 이뤄져 기쁘다”고 말했다. 재판정에서는 자손들까지 4대가 나와 박화춘의 증언을 지켜봤다. 증손자 윤지혁(11·강정초 4)·하은(9·강정초 2) 남매는 “할머니가 무죄를 받아 기쁘다”며 박화춘의 손을 잡았다.

박화춘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라는 말에도 “괜히 말을 해 주위 사람들을 못 견디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제주어로 무죄 선고한 판사

제주지방법원 4-1형사부(재판장 장찬수) 심리로 열린 이날 직권재심 재판에서 박화춘이 보여준 마음 씀씀이는 넓고 깊었다. 그는 연신 자식들과 법원·검찰 관계자들이 자신을 위해 나서는 수고로움에 미안해했다. 광주광역시 출신인 장찬수 재판장이 서툰 제주어로 ‘박화춘의 무죄’를 선고했다. “오늘 판결로 억울하게 옥살이한 일이 풀어져수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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