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인도교 폭파는 학살의 시작이었다 [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김봉규 2022. 12. 7.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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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제노사이드의 기억_한강인도교

한강인도교 폭파는 많은 희생자를 냈고, 그 이후 여러 연쇄효과를 일으켰다. 우선 다리를 건너 피란 간 도강파와 그렇지 못한 채 남은 잔류파로 나눴다. 9월28일 서울 수복 뒤 도강파들은 잔류파들을 잠재적 부역자 취급했다. 실제 55만명이 부역자로 지목됐고 867명이 사형됐다.

서울 용산구와 동작구를 잇는 한강인도교는 한국전쟁 발발 나흘째인 1950년 6월28일 새벽 2시30분에 한강 철교와 함께 한국군이 북한군의 남하를 늦추기 위해 폭파했다. 기차만 다닐 수 있는 철교와 달리 한강인도교는 남쪽으로 도강하려는 피난민들이 몰려 있었다. 2007년 6월28일 평화재향군인회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유족회가 한강대교 아래서 첫 합동위령추모제를 열어 희생자들의 넋을 달랬다. 김봉규 선임기자

2007년 6월28일 서울 용산구와 동작구를 잇는 한강대교 아래 노들섬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한강다리 교각에 하얀 종이로 만든 사람 모양의 인형들을 거꾸로 매달아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표현(연출)했다. 그 위에 걸려 있는 가로, 세로 3m가 넘는 널찍한 펼침막에는 영화 <로보캅>에서 나오는 강철로봇처럼 무장한 군인들이 겨누는 총구 앞으로 무서움에 떠는 벌거벗은 여자들과 아이들이 그려져 있었다. 피카소가 한국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1951년 1월 작)이었다.

평화재향군인회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유족회가 사건 발생 57년 만에 한강인도교 폭파 현장에서 진행한 첫 합동위령추모제 참석자는 40여명으로 단출했다. 사회자는 당시 폭파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으나 유가족이나 연고자가 없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찾는 노력도 없었다며, 지금까지도 구천을 헤매고 있는 영혼들의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전통제례와 추모 묵념에 이어 사회자가 한강인도교 폭파 개요를 참석자들에게 상세하게 설명했다.

“아아! 영령들이시여 영문도 모른 채 원혼이 되신 영령들이시여….”

축문 낭독에 이어 대금 연주자 김평부(김숨)씨가 한국전쟁 당시 폭파됐던 한강대교 교각 쪽을 바라보며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음률을 선보였다. 한강대교 바로 위로 지나다니는 자동차 마찰음과 건너편 철교 위를 지나는 기차 소리에 구슬픈 대금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숙연했다. 추모제를 마친 참석자들은 한강대교 아래 시멘트 바닥에 둘러앉아 식은 김밥에 소주를 한잔씩 나눠 마시고 헤어졌다. 한강인도교 폭파 희생자 첫 위령합동추모제는 조금은 쓸쓸했다.

한국전쟁 70주년이었던 2020년 6월28일엔 서울시가 한강대교 교각에서 50m쯤 떨어진 노들섬 둔치에 세로 4.7m, 가로 1.1m 크기 위령비를 세웠다. 특이하게 위령비는 하늘을 향해 서 있는 게 아니라 땅바닥에 납작하게 누워 있었다. 위령비는 “이 자리에서 원통하게 희생된 분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다짐하기 위해서 추모 공간을 조성하고 이 글을 새긴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터지고 사흘 뒤 이뤄진 국군에 의한 한강인도교 폭파 희생자 수는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국방부는 사망자 대부분은 다리를 건너고 있던 경찰 77명뿐이라고 발표했지만, 평화재향군인회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유족회가 펴낸 ‘한강인도교 폭파 증언록’들을 발췌한 자료와 폭파 당시를 목격한 미 군사고문의 발언 등을 종합하면, 피난민 500~800명가량이 폭살되거나 한강에 빠져 익사했다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다.

북한군 남하 저지를 명분으로 이뤄진 한강다리 폭파로 서울 외곽에서 북한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치르던 국군 주력은 퇴로가 막혀 섬멸될 수밖에 없었다. 차량 1천여대 등 막대한 군수물자가 북한군 수중으로 들어가는 등 한국군 역사에서도 오점으로 남아 있다.

특히 한강인도교 폭파는 그 자체로도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그 이후 여러 연쇄효과를 일으켰다. 우선 한강다리 폭파로 미리 다리를 건너 피란 간 도강파와 건너지 못한 채 남을 수밖에 없었던 잔류파로 나뉘었다.(<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권 59쪽) 다리 폭파 3개월 뒤 9월28일 서울이 수복되자 북한군 점령 지역에 남아 있던 잔류파들은 도강파에 의해 잠재적 부역자 취급을 받아야 했다. 이승만 정부의 군·경·검 합동수사본부는 10월4일~11월13일 총 55만915명을 부역자로 검거 및 인지하고, 그들 중 867명을 사형했다.(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권 117쪽)

한강인도교 폭파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전쟁이 나고 이틀 뒤 이승만 대통령을 태운 기차가 서울역과 용산역을 지나 한강을 건너 남으로 내려가자 이튿날 새벽 한강 다리들이 폭파돼 끊겼고, 이와 동시에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민간인 학살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도착하기 전 군·경은 해당 지역에서 불순분자라고 의심되는 정치범, 보도연맹원, 예비검속된 민간인 등을 아무런 법적 절차도 밟지 않은 채 대량 학살했다. 남침한 북한군에 협조할 우려가 있는 이들을 미리 제거하고 나선 것이다. 나치에게 유대인은 국민이 아니었듯 당시 위정자들에게 그들은 국민이 아니었다.



김봉규 ㅣ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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