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사찰 묘적사] 백봉산 남쪽 기슭에 오시면 마음을 살짝 내려놓으세요

이재진 2022. 12. 7.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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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적사는 역사에 비해서 큰 사찰은 아니지만 고즈넉한 분위기가 찾는 이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곳이다. 드론으로 촬영한 묘적사 전경.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과 진건면에 위치한 백봉산柏峰山(587m)은 금곡역에서 마석역에 이르기까지 경춘선 철도와 나란히 동서로 산줄기를 뻗어 내리고 있다. 북쪽으로 마치고개 거쳐 천마산, 남동쪽으로 수레넘이고개 지나 고래산으로 이어지는 산군을 이룬다. 묘적산으로도 불렸다. <동국여지승람>에 '양주목楊州牧 주동쪽 70리에 묘적산妙寂山이 있다'는 기록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 등에도 '묘적산'으로 표기돼 있다.

정상의 멋진 조망대에서는 천마산을 시작으로 희야산, 운길산, 예봉산, 검단산, 그리고 서울 외곽을 형성하는 관악산에서 북한산~도봉산과 불암산~수락산 등 서울과 남양주 일원의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산세가 걍팍하지 않고 교통이 편리한 데다 산의 남쪽에 신라시대 때 세워진 오래된 사찰도 품고 있어 중장년층과 가족 단위 산행객들에게 오래전부터 사랑받아 왔다. 백봉산은 산기슭에 아파트단지들이 있어 산행 기점이 다양하다. 주요 기점으로는 평내호평역, 금곡역, 마석역의 3개 경춘선 복선전철역 기점 코스 외에 마치고개와 신라 고찰 묘적사 기점 코스를 꼽을 수 있다.

대웅전 왼쪽 오솔길을 오르면 산신각과 석굴암이 있다. 그리 넓지 않은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경내 모습이 아름답다.
대웅전 앞 팔각칠층석탑. 조선 전기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도권의 명산들이 파노라마처럼

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 묘적사 방향으로 가는 길은 고즈넉한 가을 정취를 음미하면서 걸을 수 있는 사색의 길이다.

묘적사는 계곡을 옆에 두면서 간다. 이 계곡은 월문천의 발원지로 월문천은 남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합류한다. 여름에는 피서객들이 앞다퉈 찾는 소문난 물놀이 장소지만 계절이 바뀌면 철지난 바닷가처럼 소란스러움은 온데간데없고 호젓함만이 길벗이 돼주는 길이다.

묘적사妙寂寺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고증할 만한 기록이나 유물은 남아 있지 않다. 옛 기록을 보면 조선 초기에는 그 사격寺格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대웅전 앞의 장대석을 보면 최소한 조선 초기에 왕실의 지원으로 대대적인 중창이 됐거나 그보다 훨씬 전에 창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궁궐 외에 다듬은 장대석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대웅전 앞 팔각칠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9호)은 그 시대 유물로 추정된다. 기단부는 팔각 지대석 위에 하나의 돌로 조성된 팔각 2층 기단이 있다. 양식적으로 보면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및 수종사 오층석탑과 비슷해 조선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고려 양식을 모방하고 있어 사찰의 건립 연대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경내 작은 연못 뒤로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기거하는 건물.
대웅전 앞에 잘생긴 은행나무가 경내를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승군들의 훈련장… 화살촉 발견되기도

전해지는 말에 묘적사는 왕실 직속 비밀요원들이 군사훈련을 하던 곳으로, 국왕이 필요한 사람을 뽑아 승려로 출가하게 한 뒤 이곳에 머물게 했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는 유정(사명대사)이 승군을 훈련하는 장소였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뒤에는 승려들이 무과 시험을 준비하는 훈련장이었다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는데, 두 차례는 잘 막았지만 마지막 한 번의 공격을 막지 못해 폐허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를 뒷받침하듯, 사찰 동쪽 빈터에서 화살촉이 발견되기도 했다.

묘적사가 다시 중건되는 시기는 19세기로 절에 남아 있는 기록 중 '묘적산산신각창건기'에 따르면 1895년(고종 32)에 규오 법사가 산신각을 중건했다고 한다. 그 뒤 1969년에 화재로 대웅전, 산신각 등이 소실되었다가 대웅전과 요사채가 정비되고 1976년에 다시 대웅전을 비롯해 관음전과 마하선실을 중건하고, 1979년과 1984년에는 나한전과 산령각을 각각 건립했다.

동양화가 박진순 화백의 '묘적사의 가을'.

주변 산세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묘적사는 작은 사찰이다. 하지만 독특한 건물 양식으로 주변의 산세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마하선실과 요사채가 반듯한 네모꼴 마당을 이루었는데, 대웅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의 기둥과 부재들이 다듬지 않은 나무로 지어져 있다. 특히 대중방의 기둥이 인상적이다. 누구든 이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동심으로 돌아갈 것 같다. 묘적사는 꽉 닫힌 속세인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수호신장처럼 나란히 서있는 두 그루의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가을이면 등불처럼 경내를 노란빛으로 물들인다.

대웅전 오른쪽에서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보리수를 따라가 보면, 산신각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휘도는 모양새가, 짧은 길을 대단히 깊어 보이게 만든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따스한 분위기의 산신각 마당도 찾는 이들로 하여금 하염없이 앉아 있고 싶게 만든다. 잠시 몇 개의 계단을 올랐을 뿐인데 사찰의 분위기는 더욱 더 깊은 가을로 침잠해 들어간다. 작은 공간 속에 점점이 서있는 전각과 건축물, 그리고 나무들이 원래부터 당연히 있어야 할 곳인 듯 너무도 자연스럽다. 묘적사는 세상의 들끓는 욕망을 응시하게 하는 거울 같은 사찰이다.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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