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칼럼] 포르투갈과 한국
12월2일,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의 16강 진출을 결정하는 포르투갈과의 경기가 있었다. 실낱같은 기적이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져 포르투갈을 2-1로 이겨, 한국은 12년 만에 16강에 올랐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포르투갈 사람인 것도 유별난 인연이고, 8강에 오르는 문턱에서 만났던 브라질도 포르투갈의 옛 식민지였다. 유럽 대륙의 서쪽 끝자락에 있는 포르투갈과 직선거리로 1만㎞ 이상 떨어진 한반도 사이에도 괴테가 말한 어떤 ‘친화력’이 있는 것 같다.
축구로 맺은 포르투갈과의 인연은 1966년 여름, 영국에서 열렸던 월드컵 대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한반도의 남쪽 팀이 아니라 북쪽 팀이었다. 많은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경기였다. 당시 강호 이탈리아를 예선에서 꺾고,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8강에 오른 북한은 포르투갈을 맞아 전반전에 세 골을 연속으로 먼저 넣었으나 연이은 실점으로 3-5로 졌다.
한반도의 땅을 최초로 밟은 서양인도 캄보디아에서 중국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나 1604년 6월15일, 통영 해안에 표류했던 포르투갈 상인 주앙 멘데스다. 중국, 일본, 그리고 아프리카 선원들과 함께 조선 수군에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된 멘데스 일행은 관리들의 심문을 받고 중국으로 추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기록을 남긴 네덜란드인 하멜보다 반세기 전에 조선 땅을 밟았다. 포르투갈이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와 남인도 사이에 있었던 무역을 지칭했던, 이른바 ‘남만무역(南蠻貿易)’을 주도했던 시기였다.
2006년 통영시는 이 사건을 기록한 기념비도 세웠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기에 큰 민족적인 비극이 발생했다. 임진왜란 때 적게는 2만~3만명, 많게는 10만명이 넘는 조선인 포로, 이른바 피로인(被擄人)이 일본에 끌려갔다. 이 가운데 7500명 정도만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귀환했다. 이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려는 조선의 공식적인 쇄환(刷還)정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이들을 맞이한 조국의 반응은 절개를 버렸다는 싸늘한 시선과 함께 온 사회적 냉대였다.
포르투갈, 강국 틈새서 생존 부심
가장 불행한 운명을 맞이한 포로들은 일본,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와 청나라 상인들에 의해 아득히 먼 땅, 이탈리아와 포르투갈까지 팔려나갔다. 네덜란드 화가 루벤스가 남겼던 소묘의 모델로 알려진 ‘안토니오 꼬레아’(1606)는 그때 이탈리아로 팔려 온 노예였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포르투갈로 팔려온 조선인 노예에 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포르투갈에 팔려온 중국인 노예들 가운데 유난히 ‘안토니우’라는 이름이 많다. 중국인과 조선인이 확실히 구별되지 않았던 상황이었기에 이들 가운데는 조선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적지 않게 섞여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해보게 된다.
이번 경기 시작 전 연주된 포르투갈의 국가 ‘아 포르투게자’는 애국가와 비교하면 아주 전투적이다. “바다의 영웅/ 고귀한 민족/ 용맹한 불멸의 조국이여/ 오늘 새로이 일어나라/ 빛나는 포르투갈이여/ 기억의 짙은 안갯속에서/ 오 조국이여/ 그대를 승리로 이끌 위대한 선조의 목소리를 느껴라.”
그러나 공식적인 이 국가 이상으로 포르투갈 사람들이 사랑하는 제2의 국가가 있다. 1974년 4월25일, 40년 이상이나 지속한 살라자르의 독재를 무너뜨린 청년장교들이 주도했던 ‘카네이션 혁명’의 시작을 알렸던 노래 ‘그란둘라, 빌라 모레나’다. 주제 아폰수(1929~1987)가 1964년에 작사와 작곡한 이 노래는 오랫동안 금지되었다.
1933년에 집권한 살라자르가 추진했던 광업과 농업의 개발정책에 따라 리스본에서 멀지 않은 남쪽 지방 그란둘라에 광부와 공장노동자, 벼농사에 종사하는 농업노동자들이 이주했다. 그들의 삶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바로 이들의 평등한 사회로 향한 꿈과 투쟁을 그렸던, 도입부가 인상적인 행진곡풍의 투쟁가다. “그란둘라/ 햇볕에 그을린 곳/ 박애의 땅/ 민중이 네 속에서 힘을 가진 도시/ 네 속에서 민중이 힘을 가진 도시/ 그란둘라/ 햇볕에 그을린 곳/ 구석마다 친구/ 모든 얼굴에 평등/ 그란둘라/ 햇볕에 그을린 곳/ 박애의 땅/ (…) 나이를 알 수 없는 상수리나무 그늘 속에서/ 나는 맹세한다/ 그란둘라/ 네가 원하는 대로/ 그란둘라/ 네가 원하는 대로/ 나이를 알 수 없는 상수리나무 그늘 속에서.”
이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1970년대 초부터 애창되었던 ‘아침이슬’과 함께 5·18 민주화운동 직후에 나온 ‘님을 위한 행진곡’을 떠올리게 된다.
특히 ‘님을 위한 행진곡’에 대해서 합창이냐 제창이냐는 형식을 두고 정치적인 공방이 오랫동안 지속했다. 언제 이 노래도 ‘그란둘라, 빌라 모레나’처럼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불리는 제2의 애국가가 될 수 있을지.
살라자르는 군부 출신이 아니라, 원래 경제학 교수였다. 그러나 군부, 가톨릭 교회, 귀족과 중상층 그리고 왕당파 등의 지지를 기반으로 해서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버금가는 ‘에스타두 노부’(새로운 체제)라는 독재체제를 수립했다.
파스칼 메르시어(페터 비에리)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묘사된 것처럼 비밀경찰(PIDE)에 의한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탄압도 무자비했다.
유신체제를 떠올리게 하는 이 암울한 40년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은 카네이션 혁명이 끝난 후 근 50년, 포르투갈 민주주의의 현주소는 어떤가. 다른 유럽국가와 달리 포르투갈에는 그동안 극우세력이 정치무대에 등장하지 못했다. 최근에 이런 상황에도 변화가 오기 시작했지만, 민주주의가 불안정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정치권의 부정부패와 사법기관의 비효율성에 문제가 있음에도 포르투갈의 민주주의는 지속 가능한 상태에 있다. 특히 언론의 자유는 북유럽권의 몇 나라와 함께 세계 최고의 수준에 있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미·중 갈등 속 우리에겐 타산지석
내가 사는 동네에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온 은퇴자들이 많이 산다. 복잡한 유럽의 역사가 남긴 흔적이다. 15~16세기의 대항해시대를 열었던 포르투갈은 최초의 글로벌 제국이었지만 후속 주자였던 이웃 강대국 스페인, 프랑스 그리고 영국과 긴장과 갈등 속에서 항상 살았다. 따라서 이들과의 복잡한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느냐는 왕정이나 공화정을 막론하고 사활적인 문제였다.
스페인 왕국으로부터 포르투갈 왕국이 1668년 독립했을 때 영국의 힘을 빌렸다.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아 1807년 포르투갈 왕이 자국의 식민지 브라질로 망명의 길을 떠났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1차 세계대전 때 포르투갈은 중립을 선포했으나 자국의 아프리카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결국 독일과 대치했던 영국 편에 섰고, 적지 않은 희생도 치렀다.
2차 세계대전 때의 상황도 비슷하다. 살라자르도 개전 초 중립을 선포했지만, 미국에 대서양에 있는 포르투갈령 아조렌 섬의 군기지 사용을 허락했다. 그러나 뒤로는 무기생산에 필요한 텅스텐을 독일에도 제공했다.
리스본은 당시 연합국과 독일 간의 치열한 첩보전이 벌어진 무대였고, 나치를 피해 미국을 비롯한 제3국으로 망명의 길을 찾았던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땅이었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 <리스본의 밤>이나 험프리 보가드와 잉그리드 버그먼이 주연한 영화 <카사블랑카>에도 리스본에 관한 이야기가 그래서 많이 나온다.
강대국 틈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취할 수밖에 없었던 포르투갈의 이중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갈수록 심화하는 미·중 간의 갈등구조 속에서 한국의 좌표를 스스로 정립하기 위한 노력에 하나의 본보기라는 생각도 든다.
이번 한국과 포르투갈의 경기를 보면서 90분 안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뜻으로 자주 언급되는 ‘축구공은 둥글다’는 말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한때 세계를 경략했던 포르투갈이 어떻게 역사와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축구공이 둥근 것처럼 우리가 사는 둥근 지구 위에는 영원한 중심, 불멸의 제국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도 확인하게 된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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