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의 시선] 금녀(禁女)의 구역

이선영 MBC 아나운서 2022. 12. 7.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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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이선영 MBC 아나운서]

우리 축구 대표팀의 16강 진출 선전과 함께 회사에 활기가 돈다. 지난 2022년 한 해를 돌아보면 각종 재난이 끊이지 않아 뉴스를 전하는 보도국 온도는 특히 늘 얼음장 같았는데, 축구 소식 덕에 큐시트 블록에 모처럼 뜨거운 열정이 차오른다. 카타르 월드컵 소식은 서울 본사에서 현지 영상을 받아 제작하기도 하지만, 현지에 파견된 기자들이 제작한 리포트에서는 그만이 전할 수 있는 생동감이 살아 숨 쉰다. 늘 하던 방식으로, 비슷한 음향장비로 목소리를 녹음해 리포트를 제작해도 현지의 설렘이 기자 목소리에 녹아들어 톤부터 다르다.

그런데 MBC의 카타르 월드컵 현지 보도를 잘 들어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전부 남성의 목소리라는 점이다. 따져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주중, 주말 뉴스데스크의 스포츠 뉴스를 전하는 앵커는 이영은박소영 아나운서로 전부 여성 앵커인데, 지구촌 최대 스포츠 축제인 월드컵 소식을 전할 때는 정작 이들의 목소리가 아예 빠질 때가 많았다. 스포츠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인데도 이들은 애초에 현지 파견 대상에 고려되지도 않았다. 대신, 원래 이들이 진행하던 스포츠 뉴스는 결방되고, 출장을 나간 남성 기자가 앵커 역할을 하는 날이 더 많았다.

중계진에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현실은 이미 모두에게 익숙해져 문제시 되지 조차 않는다. MBC에서 우리나라 경기를 중계하는 1진 중계진은 김성주-안정환-서형욱, 그 외 주요 경기를 중계하는 2진 중계진은 김나진-박문성, 3진 중계진은 정용검-박찬우, 각종 더빙을 진행하는 막내 중계진, 하이라이트 프로그램 MC 조차도 전부 남성들이다. 그나마 KBS가 주말 여성 앵커를 카타르 현지로 보내 현지 리포팅을 맡겼고, 여성MC가 아침에 그날 경기 일정을 종합하는 하이라이트를 진행한다. MBC와 SBS는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 카타르월드컵 MBC 중계진
▲ 카타르월드컵 SBS 중계진
▲ 카타르월드컵 KBS 중계진

이런 분위기는 축구야구 등 전통적으로 남성 중계가 보편적이라고 인식되는 스포츠 이벤트 뿐 아닌, 종합대회인 올림픽 등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과 서울YWCA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경기 중계방송 325건을 분석했더니 여성 캐스터가 중계한 경기는 전체의 7%에 불과했고, 지난 도쿄 올림픽 당시 지상파 3사 여성 캐스터는 KBS 박지원 아나운서, MBC 김초롱 아나운서 단 2명이었다.

스포츠가 여전히 금녀(禁女)의 영역인 것은, 시청자와 마주하는 진행자 이야기만은 아니다. MBC 스포츠 뉴스를 제작하는 스포츠 취재부에 여성 기자는 0명이다. 뉴스가 아닌, 각종 스포츠 프로그램과 중계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스포츠PD 사정도 비슷하다. 딱 한 명의 여성 스포츠PD가 있지만, 2007년 '지상파 3사 최초 여성 스포츠PD' 타이틀을 달고 입사한 그 이후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스포츠 분야 여성 PD 입사는 전무하다.

스포츠가 가치 있는 이유는 인종과 성별, 연령이나 계층을 떠나 모두에게 동등한 감동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스포츠가 점점 거대 자본에 잠식되며 돈 없으면 즐기지 못하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가는 흐름 속에서, 지상파 인프라는 때로는 거대한 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모두의 스포츠'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렇게 모두를 위한 스포츠 콘텐츠를 만들어 가는 구성원이 오로지 남성뿐이라는 것에는, 분명히 모순이 존재한다.

이런 모순이 익숙해질수록, 기존의 한계를 깨부수려는 어떤 개인은 더 큰 리스크를 안게 된다. “해봤더니 여자는 별로더라”라는 혹자의 평가를 굳이 나서 받고 싶은 PD도, 여성 진행자도 없다. 여성을 정말 꺼려서가 아니라 진행자와 제작진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관행 때문에 개인이 깨부수기 힘든 나름의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것도 많이 알려져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아니다.

단번에 될 일이 아니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현지 취재와 리포팅, 짧은 더빙부터 남성들이 거친 과정을 여성들도 똑같이 거치며 차근히 만들어져야 한다. 과거 비슷한 역사를 거쳐 벽을 허물어온 영역이 있다. 오래전 앵커는 남성만의 영역이었다. 또, 정치부 기자가 그랬고 미국 특파원이 그랬다. 여전히 적은 비중이지만 걸출한 시사 프로그램 여성 앵커도 활약하고 있잖은가. 스포츠도 그렇게 자신들의 한계를 부수어야 할 시점이 꼭 찾아온다. 누가 선구자가 되느냐만 남았다.

내년에도 스포츠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다. 3월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5월 자카르타 U-20 월드컵, 7월 여자 월드컵, 9월 항저우 아시안 게임까지. 방송사마다 스포츠에 대한 자신들의 세계관과 가치를 중계에 투영하려고 짧은 예고 한 편 만드는 것에서부터 해설진 구성까지 얼마나 구슬땀을 흘릴지 벌써부터 눈에 선하다. 그 노력에 지금까지 누군가 함부로 도전하지 못했던 가치가 더해져, 스포츠에 '금녀(禁女)'의 구역은 없다는 역사가 쓰였으면 좋겠다.

▲이선영 MBC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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