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191] 월드컵과 붉은 함성

김규나 소설가 2022. 12. 7. 00:4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하얀 벽에 난 그 자국은 작고 동그랬다. 사람은 생소한 것을 보면 온갖 상상을 다한다. 열심히 지푸라기를 운반하는 개미들처럼 그걸 집어 들고 살펴보다가 이내 팽개쳐버린다. 어쨌거나 나는 저 자국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일어나서 확인할 수도 있지만 그래봐야 십중팔구 무슨 자국인지 확실히 말할 수 없을 게 뻔했다. 왜냐고? 일단 어떤 일이 벌어지면 그게 어떻게 벌어졌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부정확한 사고! 인간의 무지! - 버지니아 울프 ‘벽 위의 자국’ 중에서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이 월드컵 16강 진출을 달성하고 모든 일정을 마쳤다. 비록 8강 진출은 실패했지만, 마지막 경기가 열린 새벽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끝까지 응원했다. 내가 태어나 자란 땅에 대한 애착,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라에 대한 소속감을 확인하는 데 스포츠 응원만 한 것이 또 있을까. 이번에도 거리응원은 ‘붉은 악마(Red Devil)’가 주관했다.

2002년, 국민 모두 붉은 악마가 되자며 ‘Be the Reds!’가 프린트된 티셔츠가 유행했다. 공식 응원 앨범 제목은 ‘꿈★은 이루어진다. Red Devil’이었다. 2006년엔 레드와 함께 가자는 뜻의 ‘Reds go together’, 2010년엔 붉은 함성으로 하나 된 한반도라고 이해되는 ‘The shouts of Reds. United Korea’였다. 2014년과 2018년엔 우리가 붉은 악마라며 ‘We are the Reds’, ‘우리는 하나. We, the Reds’였다. 올해는 ‘더 뜨겁게, the Reds’라고 한다.

의식의 흐름 기법의 대표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소설 속 화자는 벽에 생긴 얼룩을 보고 그 자국에서 연상되는 생각을 끝없이 따라간다. 그의 사고는 인간의 본성과 예술과 종교, 깊은 인생철학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꼬리에 꼬리를 물며 그를 생각하게 만든 자국의 실체는 벽을 기어오르던 작은 달팽이였다.

빨간색이란 단어는 공산주의자, 좌익을 뜻하기도 해서 한동안 사회적으로 배척당했다. 하지만 벽의 자국이 작은 달팽이인 걸 알면 싫어할 일도, 무서울 일도 없다. ‘내 생각의 주인은 나’인 것 같지만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며 오해와 편견에 함몰되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