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라자카(神楽坂)의 도시전설
신이 머물렀다 가는 곳, ‘가구라자카(神楽坂)’. 도쿄 신주쿠구의 지명 중 하나로 보통 700미터 정도의 거리를 일컫는다. 차 두 대가 겨우 교차할 만한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음식점과 술집 등이 늘어서 있다. 그 이름처럼 가구라자카는 언덕(坂)이다. 신위를 모신 가마를 잠시 멈춰두는 곳, 신악(神楽)이 언덕까지 들려와서 그 지명이 됐다는 설도 있다.
이곳의 진짜 매력은 중심 거리가 아닌 한 걸음 더 들어간 골목들이다. 고급 전통 음식점이나 미슐랭 레스토랑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더 눈길을 끄는 건 정체 모를 공간들이다. 간판이나 출입구, 정원 등의 모양새로 봐서 음식점은 맞지만 일반인들은 쉽게 발을 들일 엄두가 나지 않는 곳들이다.
거처를 가구라자카로 정하다 보니 매일 보이는 풍경들이 있다. 밤거리를 걷다 보면 좁은 도로 한쪽에 검은색 고급차량들이 늘어서 있다. 이따금 보이는 게이샤들은 발걸음을 재촉한다. 정치인이나 기업 임원들은 뒷골목 요정에서 비밀 회동을 마치고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배웅을 나온 여주인들은 떠나는 차를 향해 깍듯이 인사를 한다.
고개를 숙이는 이들, 가구라자카를 떠나는 이들,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한다. 가구라자카 거리는 일본에서 보기 드문 ‘역전(逆転) 일방통행’이다. 밤과 낮의 차량 통행 방향이 반대이다. 오전에는 언덕 위에서 아래쪽으로만 통행할 수 있다. 도쿄의 중심으로 향하는 방향이다. 야스쿠니신사, 황거, 총리관저, 그리고 정부 청사가 밀집해 있는 가스미가세키가 코앞이다. 정오부터 자정까지는 반대로 도쿄의 중심에서 빠져나오는 길이다.
이 특이한 교통 체계와 함께 회자되는 거물 정치인이 있다. 그를 수식하는 여러 별칭 중에서도 특히 ‘야미쇼군(어둠의 장군)’이 어울리는 다나카 가쿠에이. 그가 가구라자카 인근 자택에서 국회의사당까지 편하게 출퇴근을 하기 위해 역전 일방통행을 도입했다는 설이 있다. 물론 다나카는 실제로도 가구라자카와 인연이 깊다. 그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둔 가구라자카 게이샤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일본인들이 가구라자카와 다나카의 도시전설을 정설로 받아들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다나카는 전무후무한 흙수저 출신의 정치인이다. 막일꾼을 하다 토건회사 사장을 거쳐 최연소 총리까지. 학력은 소학교가 전부였지만 중의원에 당선된 것만 열여섯 번이다. 일본열도를 개조하겠다던 구상력과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재평가되고 있다. ‘정치는 수, 수는 힘, 그리고 힘은 돈이다’ 라는 그의 말처럼, 결국 권력형 비리 사건으로 체포되며 돈으로 흥한 뒤 돈으로 망한 사례가 됐지만, 그의 리더십은 총리 재임 후 50년이 지나도록 회자된다.
가구라자카의 식당에서 일본인 친구 M과 시작한 ‘일방통행’에 관한 대화는 그렇게 옛 총리를 지나 일본의 정치로 옮겨갔다. M은 그런 ‘특이한’ 정치인이 일본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했다. 색깔 없는 총리, 인물 부재, 정치에 대한 무관심, 무기력한 젊은이들, 하락하는 국가의 위상, 금권정치의 상징이었던 인물을 재평가하고 그리워해야 하는 사회. 일본의 구성원 누구나 알고 있는 이런 문제들은 과거에 대한 동경을 낳고, 우경화를 부채질한다.
M도 딱히 다를 건 없다. 지금은 도쿄에서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 정치인이 될 계획이다. 현 의원을 지낸 조부 덕분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출마해서 가업을 이어받을 수 있다. 정치인으로서 자질과 역량을 떠나 이름 하나만으로도 먹고 살 걱정이 없는 기득권이다. M과 같은 친구들이 여전히 많다. 거대한 내수시장을 지탱했던 ‘1억 중산층’이 옛날 말이라지만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여전히 그 기억은 계승되고 있다. 풍요로웠던 기억의 언저리에 머물며 굳이 애쓰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일본 바깥의 세상은 여전히 불편하고 위험하다. M은 ‘정신 차리라’는 내 말에 답했다. “우리도 모두 알고 있어. 다만 지는 해를 보며, ‘석양이 참 아름답구나’ 라고 생각할 뿐이야.” 꼭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가구라자카도, 다나카 가쿠에이도 그저 오래된 이야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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