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형 논리 생산?…정부 ‘머리’ 아닌 ‘손발’ 된 국책연구기관
정부 압박에 전 원장 사임한 이후
법인세 인하·낙수효과 옹호 등
친정부적 시각 보고서 잇따라 발표
“정부 예산 지원, 주제는 반영하되
연구 내용 독립적이어야 신뢰 유지”
지난 1일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에 조동철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가 선임됐다. KDI 원장 자리는 홍장표 전 원장이 사임한 뒤 약 4개월간 공석이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소득주도성장을 설계한 홍 전 원장은 임기가 2년가량 남은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의 사퇴 압박을 받고 지난 7월 원장직에서 물러났다. 조 원장은 취임사에서 “진영 간 이념논쟁에서 벗어나 정론의 정책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강조했다.
조 원장의 ‘탈진영’ 취임사는 최근 불거진 KDI 중립성 훼손 논란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월 한덕수 국무총리는 홍 전 원장을 두고 “우리(윤석열 정부)하고 너무 안 맞는다. 소득주도성장 설계자가 앉아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사퇴를 종용했다.
홍 전 원장 사임 이후 KDI는 법인세 감세 등 정부의 세제 개편안을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보고서(법인세 세율 체계 개편안에 대한 평가)를 냈다. 보고서는 법인세 최고세율을 3%포인트 내리면 투자가 증가하고 경제가 성장한다고 단언했다. 또 ‘법인세 인하가 부자 감세라는 주장은 정치 구호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담았다.
국책연구기관의 경제관련 보고서에서 ‘정치구호’라는 주관적 표현을 쓰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현재 경제 상황과 맞지 않는 10년 전 경제 데이터를 무리하게 끌어다 써 경제학적으로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우려도 있었다. 이 때문에 해당 보고서 발행 전 KDI 내부에서는 내용수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묵살됐다.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감을 앞두고 법인세 인하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적합하지 않은 데이터, 모형으로 엉터리 보고서를 낸 것”이라며 “학문적 양심이 의심된다”고 했다. 그러나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정감사 기간 동안 해당 보고서를 내세워 법인세 감면을 옹호했다. KDI 보고서가 국감 방탄용으로 쓰인 셈이다.
지난달에도 KDI는 국가채무를 낮추고 재정여력 확보를 위해 소득세·부가가치세는 증세하고 법인세는 감세하자는 보고서를 냈다. 조세재정연구원(조세연) 역시 지난달 22일 발표한 조세재정브리프(우리나라 법인세율 체계 개편 필요성 검토)에서 “전문가·기업을 대상으로 정부의 법인세 인하 방안에 대해 찬반을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67.6%가 찬성하고 있다”며 법인세 감세를 촉구했다. 이날 기재부는 조세연 보고서 공개에 맞춰 법인세 개편 필요성을 강조한 설명자료를 별도로 냈다.
역대 정부에서도 필요에 따라 국책연구기관을 ‘머리’가 아닌 ‘손발’로 썼다. MB 정부 시절인 2011년 11월 KDI는 내년도 경제성장 전망을 발표하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경제성장률 상승효과’를 분석해 넣었다.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3.8%지만 KDI는 “한·미 FTA가 예정대로 2012년 초 공식 발효될 경우 3.9~4.1% 성장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한·미 FTA가 한국의 수출입 규모를 확대시켜 0.1~0.3%포인트 추가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당 보고서는 단기 효과만을 고려해 성장률 향상을 추정했는데, 연구에 대한 근거가 빈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당시 KDI 기존 연구기관의 연간가능일반균형(CGE) 모형 결과를 기초로 추산했다는 입장을 밝혔을 뿐 구체적인 근거는 내놓지 못했다.
KDI 연구원 출신인 현직 대학교수는 “KDI를 비롯한 국책연구원은 정부 산하기관이다보니 정부 정책 기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갑자기 높은 분들이 관심이 있는 주제에 대해서 인센티브를 줄 테니 시사점을 도출하자고 내려오면 정책 기조에 부합하는 형태로 결론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국책연구기관의 ‘곡학아세’ 논란은 있었다. 2018년 경제·인문사회연구회(이하 경사연)와 산하 정부 출연연구기관을 대상으로 한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노동연구원의 연구가 왜곡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노동연구원이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에는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 감소를 가져온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해놓고, 문재인 정부에서는 ‘고용에 영향이 없다’고 연구 결과를 뒤집었다는 것이다. 당시 주호영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의원은 “문재인 정부 들어 26개 국책연구기관 중에서 19곳 기관장이 소위 ‘캠코더 인사’로 교체됐다”며 “그러다 보니 특정 정권 입맛에 맞는 정책을 억지로 만들고, 학자적 양심에 반해 통계를 해석, 왜곡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KDI는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정치적 중립성 논란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확장재정, 소득주도 성장, 최저임금 인상 등 문재인 정부의 경제 정책 기조에 번번히 비판적인 보고서를 내면서 각을 세웠기 때문이다. 2018년 6월에는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를 통해 “내년과 후년에 최저임금을 15%씩 올리면 각각 9만6000명, 14만4000명의 고용감소를 부를 수 있다”며 최저임금 인상의 부작용을 언급하기도 했다. 해당 보고서는 ‘부정확하고 편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친정부 성향의 왜곡된 연구’라는 평가는 받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KDI를 비롯한 국책연구기관의 자율성·독립성 훼손 논란이 다시 커지고 있다. 지난 8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한 연구위원은 경향신문 칼럼을 통해 감세를 근간으로 한 정부 세제개편안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러자 다음날 기재부는 경제·인문사회연구회(경인사연)를 통해 보사연의 ‘출연금 예산 및 과제 내역’과 해당 연구위원이 속한 연구실의 ‘연구별 상세 예산자료’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예산권을 쥔 기재부의 ‘통보’는 예산 삭감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김유찬 전 조세재정연구원장(홍익대 교수)은 “국책연구원에서 독립적으로 연구해 발표할 수도 있고, 기재부 눈치를 보고 편향적인 연구를 할 수도 있다. 그건 연구자 개인, 원장의 성향과 의지에 달린 문제”라며 “다만 기재부의 정책과 반하는 연구 결과를 내면 예산 삭감이나, 주요 회의에서 배제되기도 한다. 일부 연구원들이 기재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조심하는 이유”라고 했다.
박진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국책연구기관이고 정부 예산을 받는 기관이기 때문에 정부를 지원하는 연구는 필요한 업무”라며 “주제 선정에 있어서는 정부 수요를 반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만 연구 방향성을 훼손하거나, 연구 내용을 정부가 원하는 대로 따라가선 안 된다”며 “그랬다가는 정부의 나팔수로 낙인찍혀 신뢰를 잃게 되고 정부와 국민 모두에게 외면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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