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고 지니까 기분 안 나쁘네”…‘과정의 즐거움’ 일깨운 벤투호
파울루 벤투 감독과 함께한 한국 축구의 지난 4년3개월 여정이 일단락됐다.
2022 카타르월드컵에서 12년 만에 조별리그를 통과한 한국은 5일(현지시각) 16강전에서 브라질을 만나 1-4로 졌고, 패배 뒤 벤투 감독이 “계약 기간은 오늘 경기까지”라고 밝히면서 ‘벤투호의 이야기’는 끝을 맞이했다. 벤투 감독은 선수들과 함께 원정 16강이라는 ‘결과’를 냈고, 박수받으면서 퇴장할 수 있게 됐다. 요컨대, 이 이야기는 ‘성공담’이다. 다만 이 성공담의 진짜 의미를 되짚어보기 위해 먼저 이렇게 물어야 할 것 같다. 만약 16강을 가지 못했어도 여전히 성공담이었을까.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벤투 감독은 한 번도 ‘16강’을 목표라고 말한 적이 없다. 조별리그 1차전 우루과이전을 하루 앞둔 지난 23일 기자회견 자리에서 벤투 감독은 ‘월드컵에서 목표’를 묻는 말에 “저희 목표는 조별리그 세 경기에 최선을 다해서 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은 역사상 16강 진출 경험이 두 번 뿐(2002·2010)인 나라다. 항상 16강에 진출하는 팀이라면 (16강을 목표로) 압박하는 게 맞지만 한국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국 축구팬 입장에선 듣기에 따라 서운할 수도 있는 말이다.
그는 팀의 성패가 고정된 성적표로 좌우되는 일을 경계하며 늘 언론과 입씨름을 했다. 벤투 감독의 입에서 “죽기 살기로 해서 과정과 결과를 모두 잡겠습니다” 같은 각오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대신 그는 “이미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목표는 달성했다. 이제는 즐길 시간”(최종명단 발표 회견)이라거나 “내일 (포르투갈과 3차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는 자랑스러울 것이다”(조별리그 포르투갈과 경기 전날 기자회견) 같은 말을 했다. 메시지는 같았다. ‘결과’가 모든 평가를 좌우할 수 없다고, 벤투 감독은 말해 왔다.
벤투 감독의 메시지는 밖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면서 동시에 선수들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즉, ‘결과’로 선수들의 압박하기보다 지금까지의 ‘과정’에 믿음을 실어주겠다는 것. 실제 벤투호의 선수들은 본선 경기가 다가올수록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크다”, “후회 없이 우리가 가진 것을 보여주면 좋은 경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라고 말했다. 선수들의 말은 겸손하면서도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리고 이 ‘우리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단단하고 강력한지를 벤투호는 본선 한 경기 한 경기 입증해 나갔다.
포르투갈전에서 바늘구멍 같은 경우의 수를 뚫고 16강행을 이룬 뒤 믹스트존을 찾은 황인범(올림피아코스)은 “만약에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했어도 저와 저희 선수들은 그동안 저희가 해왔던 것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축구가 결과를 가져와야 하는 스포츠라 부담이 없진 않았지만 이렇게 결과를 낸 것은 저희가 4년 동안 많은 비판을 들으면서도 감독님을 믿고 꿋꿋하게 (저희 축구를) 밀고 나간 덕분인 것 같다”라고 했다.
벤투 감독과 선수들은 지난 4년 동안 쌓아온 ‘과정의 힘’을 믿었고, 사람들이 이 ‘과정의 힘’을 알아봐 주길 바랐다. 축구 팬 박정현(28)씨는 지난달 28일 가나전 패배 뒤 “지금까지 저는 축구 보면서 지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경기를) 못 하고 지는 걸 싫어하는 거였다. (가나전처럼) 잘하고 지니까 크게 기분도 안 나쁘다”라고 말했다. 이번 브라질전 패배 뒤에도 평일 새벽부터 거리응원에 나섰던 팬들은 “죄송해할 필요 없다”라고 선수들을 격려한다.
4년 전 이영표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한국 사람들은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기는 것을 좋아할 뿐이다. 이기려면 축구를 좋아하고 즐겨야 하는데 우리는 앞뒤가 바뀌어 있다. 월드컵에서 기쁨을 느끼고 싶다면 축구를 좋아해야 한다”라고 일갈한 바 있다. 2022년 사람들은 대표팀을 향해 “덕분에 ‘좋은 축구’를 봤다, 고맙다”라고 말하고 있다. 16강이라는 ‘결과’보다 축구라는 ‘과정’ 자체에서 행복을 발견한 사람이 늘었다. 과정을 보는 즐거움. 벤투호가 거둔 가장 큰 성공은 여기에 있다.
도하/박강수 기자 turn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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