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역할을 사법에 내준 정치
[한겨레 프리즘]
[한겨레 프리즘] 노현웅 | 법조팀장
세상을 뒤흔들 듯 요란한 검찰 수사와 이를 뒤쫓는 언론만 보면, 구속영장 청구와 기소에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지만, 한 사안에 대한 온전한 평가는 법정에서의 결론을 지켜봐야 가능한 때가 많다. 정치와 행정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지금, 사법부의 판결을 보며 위안을 얻을 때가 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최근에는 대법원이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와 쌍용차 노동자를 상대로 경찰이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지연이자를 포함해 30억여원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던 원심을 파기했을 때 마음이 한뼘 정도는 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안도감은 아마도 얼마 전 생소했던 경험에서 온 것 같다. 7년 전 짧게 노동담당 기자로 일했던 시절, 생산직 일용직 노동자로 일한 뒤 노동현장에서 허술하게 적용되는 노동관계법 실태에 관한 르포 기사를 쓴 적 있다. 그 기사의 존재마저 기억에서 희미해진 지난여름, 해당 사업장이 파견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사실을 알게 됐다. 법원에서 뜬금없이 날아온 증인소환통지서 덕이었다. 법정에 나와 당시의 기억을 증언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직접 목격한 일을 사실대로 말하면 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증인석에 섰지만, 이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회사 쪽 변호인이 당시 기사의 모티브를 제공한 노동자의 신원을 집요하게 캐물었기 때문이다. 혹시 제보자가 특정되면 어떤 꼬투리라도 잡아 그를 괴롭힐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 뒤로 증인석에 앉아 있던 한시간 남짓이 마치 검찰청 조사실 철제의자처럼 불편하기만 했다. 헌법상 인정되는 취재원 비닉권을 방패 삼아 제보자 신원은 끝까지 보호했지만, 자본과 맞서는 노동자들에게 손배·가압류란 여간 두려운 일이 아니겠구나, 조금이나마 간접 체감하게 됐다.
물론 책상물림 언론노동자로서 쌍용차 노동자들이 감내해야 했을 고통의 무게는 감히 짐작하기도 어렵다. 그들은 “원심을 파기하고 서울고법으로 환송한다”는 대법관의 짧은 주문 낭독을 듣기까지 13년간 피를 말리며 살아왔을 터다. 2009년 총인원의 36%에 달하는 정리해고안을 받아든 쌍용차 노동자들은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며 자동차를 조립하던 공장에 모여들었다. 죽음을 각오한 ‘옥쇄파업’에 돌입한 이들은 77일간 점거농성 끝에 헬리콥터와 기중기, 특공대로 무장한 경찰력에 진압됐다.
전쟁 체험과도 같았던 강제진압 이후 이들은 형사·민사책임이라는 또 다른 ‘국가폭력’에 맨몸으로 맞서야 했다. 먼저 파업에 적극 가담한 노동자 64명이 구속됐다. 형사처벌로 모자랐던지 경찰은 10억원대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노동자 67명의 임금채권 등에 가압류까지 걸었다. 경찰이 2019년 뒤늦게 가압류를 풀었지만, 이미 노동자들이 심각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증에 시달린 뒤였다. 몇몇 노동자와 가족들은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뜨기도 했다.
대법원이 뒤늦게나마 경찰의 강제진압을 위법한 공무집행으로 평가하고, 위협에 맞선 노동자들의 대항을 정당방위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지연된 정의’라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법원 상고심 심리에만 6년5개월이 걸렸기 때문이다. 파기환송심이 다시 기중기 파손에 따른 손해액(2심 인정액 5억9천여만원) 등에 노동자 쪽 책임을 높게 책정하면 재상고심까지 송사가 계속될 수도 있다.
‘사회적 재난’인 쌍용차 사태를 풀어보고자 많은 이들이 애썼지만, 지엄한 법질서 앞에 중재 노력은 무력했다.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와 국가인권위원회가 소송을 철회하라고 권고했지만, 경찰은 끝까지 소송을 이어갔다. 배임 혐의에 걸릴 소지가 있다는 이유였다.
마침 국회에서는 쟁의행위에 참가한 개별 노동자에 대한 손배·가압류 책임을 제한하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노란봉투법)을 통과시키기 위한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공동체의 가치 배분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사법에 내어준 정치가 스스로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할 때다.
golok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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