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본계 청년은 왜 6·25전쟁서 피를 흘렸나

신광영 기자 2022. 12. 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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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에서 홀로 50명이 넘는 중공군을 사살하는 공을 세워 한미 양국에서 최고무공훈장을 받은 일본계 미국인 히로시 미야무라. 그가 참전 당시이던 20대 때 자신의 모습이 담긴 초상화를 들고 있다. 출처 미국 의회 명예훈장 홈페이지

“당신이 미야무라 상병입니까?”

6·25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20일 중공군 트럭에서 내린 히로시 미야무라 상병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키가 178cm인 미야무라는 45kg도 안 되는 야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포로교환이 진행되던 비무장지대(DMZ)의 흙길을 가로질러 온 한 백인 장교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교의 군복에 박힌 성조기(미국 국기)를 보자마자 미야무라는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2년 반 전인 1951년 4월 24일 밤, 서서히 커져오던 중국군의 꽹과리 소리를 미야무라는 잊지 못했다. 미 육군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그는 서울 근교의 전초기지를 지키고 있었다. 그날 밤 1000여 명의 중공군 부대는 바로 옆 분대를 초토화시킨 뒤 그의 분대를 포위해 오고 있었다. 분대장이던 미야무라는 전멸을 피하기 위해 분대원 15명을 모두 후퇴시켰다. 그러곤 혼자 남아 중공군을 향해 기관총을 쐈다. 총알이 바닥나자 총검을 들고 적진에 뛰어들었다.

며칠 뒤 의식을 회복했을 때 미야무라는 중공군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쓰러진 적군이 던진 수류탄에 맞아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28개월간 포로로 잡혀 있다 미국으로 귀환한 그는 한미 양국에서 최고무공훈장을 받았다. 훈장에는 ‘총알이 떨어지기 전까지 50명이 넘는 중공군을 사살했다’고 쓰여 있다.

28개월 간 중공군 포로로 잡혀있다 미국으로 돌아온 미야무라는 28세이던 1953년 미 육군 하사로 전역했다. 출처 미국 국립기록보관소

미야무라처럼 6·25전쟁에 참전한 일본계 미국인은 5600여 명에 달했다. 이 중 255명이 전사했다. 이들은 1900년대 초 미국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의 자손이었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 미 해군기지를 공격했을 때 미야무라는 열여섯 살이었다. 진주만 공습으로 일본이 미국의 적국이 되면서 미국 내 일본인들은 시련을 맞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행정명령 9066호에 따라 일본계 이민자 12만여 명은 미 서부의 강제수용소에 갇혔다.

미야무라는 열차에 실려 수용소로 보내지는 이웃들을 보며 입대를 결심했다. 미국을 위해 싸우는 충성스러운 미국인임을 증명하는 것은 당시 일본계 청년들이 공유한 생존 본능이었다. 이들은 미국에선 일본과 내통하는 스파이로 의심받고, 일본에선 조국의 배신자로 낙인찍혀 있었다. 일본계 중심으로 구성된 미 육군 100보병대대와 442연대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유럽으로 파병돼 나치 독일군에 맞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두 부대는 미 육군 역사상 가장 많은 무공훈장을 받았다.

미국 애리조나주의 황량한 사막에 있는 포스턴(Poston)에 설치된 일본인 강제수용소.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계 미국인들은 1942년부터 1945년 초까지 미국 사회와 격리된 채 수용 생활을 했다. 출처 미국 내서널 아카이브


1942년부터 3년간 운영된 일본인 강제수용소는 미국 각지에 흩어져 살던 일본인들이 ‘일본계 미국인’으로 새롭게 각성하며 연대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 내 중국 이민자들 역시 ‘중국계 미국인’이란 정체성을 정립하게 된 분수령이 있다. 1982년 ‘빈센트 친 사건’이다. 당시 27세였던 빈센트는 결혼식을 앞두고 미국 디트로이트의 술집에서 파티를 하다 백인 남성들에게 살해됐다. 자동차공장 근로자였던 이들은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우리가 일자리를 잃었다”며 야구방망이로 빈센트의 머리를 집중 가격했다. 명백한 인종 증오 범죄였지만 주범은 집행유예 3년, 공범은 3000달러 벌금형에 그쳤다.

재미 한인들은 1992년 로스앤젤레스(LA) 폭동을 기점으로 ‘한국계 미국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미 정부의 외면 속에 목숨과도 같은 상점들이 불타고 한인들이 죽어가자 각자도생해 온 교포들은 단결된 목소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82년 6월 결혼식을 앞두고 미국 디트로이트의 한 술집에서 백인 남성들에게 폭행을 당해 사망한 중국계 미국인 빈센트 친의 영정사진을 그의 어머니가 들고 있다. 범인에게 벌금 3000달러의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지자 중국계 이민자들은 “아시아인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3000달러짜리 라이센스를 법원이 발부한 것”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출처 ‘빈센트 친 사망 40주년’ 기념사업회
1992년 4월 29일 시작된 로스엔젤레스(LA) 폭동으로 한인들이 평생 일군 상점들이 약탈되거나 불탔다. 무장 강도와 폭도들의 공격으로 목숨도 위태로웠다. 미 정부가 사태를 방관하자 한인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 재미한인들은 LA폭동을 ‘4·29’라고 부른다.

일본인 강제수용소가 생긴 지 80년, 빈센트 사건 40주년, LA 폭동 30주년인 올해는 미국에서 아시안 증오 범죄가 극에 달한 한 해였다. 수많은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총에 맞거나 칼에 찔렸고, 지하철을 기다리다 뒤에서 떠밀려 선로로 떨어졌다.

미국 사회에 조용히 순응해 온 아시안들은 ‘모범적 소수인종’인 동시에 ‘보이지 않는 이민자’로 비쳐왔다. 이런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이 코로나19 이후 중국인을 분노의 표적으로 삼자 아시안들은 만만한 희생양이 됐다.

공교롭게도 증오 범죄의 잠재적 피해자라는 공통분모는 한국계, 중국계, 일본계 미국인들을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결집시키고 있다. 지난해 발효된 아시안 증오범죄 방지법은 중국계·일본계 의원들이 공동 발의했고, 앤디 김 등 한국계 하원의원 4명이 동참해 만들어졌다.

6·25전쟁 참전용사인 마야무라는 고향인 뉴멕시코주 갤럽으로 돌아와 30년 넘게 주유소를 운영하며 살았다. 전쟁 당시의 트라우마는 평생 이어졌다고 한다. 출처 미국 의회 명예훈장 홈페이지

6·25전쟁에서 돌아온 미야무라는 지난달 29일 97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모국의 식민통치 피해국에 와서 피를 흘렸던 것은 미국 내 이방인으로서 존재가치를 증명하려는, 미국을 향한 투쟁에 가까웠다. 당시 그가 느꼈을 불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공포를 요즘 미국 내 아시안들은 여전히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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