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G 마스터'가 된 로커···김세규 비브스튜디오스 대표 "세상 떠난 톱스타들로 'VR콘서트' 꾸릴 것"
반짝 흥행했지만 음악 활동 뜸해지며 방황
3D 프로그램 접하면서 '제2의 인생 연주'
외주 제작 실력 갈고닦아 VR 콘텐츠 창작
가상현실 다큐 '너를 만났다'로 흥행몰이
SKT 등 투자 업고 메타버스로 사업 확장
북중미 진출···2024년 코스닥 상장 목표
10평 남짓한 공간에 발을 들이니 칠흑처럼 검은 카펫과 소파에 시선이 고정됐다. 이와 극명히 대비되는 흰색 벽지는 마치 인테리어 전시관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줬다. 순백의 벽 한가운데는 역시 검은 가면에 검은 옷을 입은 사내의 뒷모습을 담은 초상화가 강렬한 존재감을 과시하며 또 하나의 대비를 이뤘다. 희미한 햇빛이 비추는 창가 쪽으로 눈을 돌리니 난데없이 3대의 기타와 함께 대형 앰프가 자리하고 있었다. 차갑게만 느껴지던 집무실이 언제든 콘서트장으로도 변할 수 있다는 뜻밖의 반전을 마주했다.
서울경제가 1일 방문한 비브스튜디오스의 김세규 대표이사실은 여느 ‘사장님’ 집무실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비브스튜디오스는 위지윅·덱스터 등과 함께 국내 대표 컴퓨터그래픽(CG)·시각특수효과(VFX) 기업으로 꼽히는 회사다. MBC 가상현실(VR) 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를 만들고 방탄소년단(BTS) 멤버 ‘슈가’의 홀로그램을 제작해 증강현실(AR) 콘서트를 선보이는 등 확장현실(XR)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예술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회사라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사장실에 기타와 앰프 세트가 완비된 모습은 꽤나 생경한 풍경이었다. 이곳이 영상 제작사인지 아니면 연예 기획사인지 혼란을 줄 정도였다. 실제로 김 대표는 본인의 정체성을 묻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뮤지션”이라고 답했다. 그는 “최근에는 바빠서 활동을 거의 못 하고 있지만 32년간 록밴드에 몸담아온 뼛속부터 ‘로커’ 출신”이라며 “창업도 부유한 로커가 되기 위해서 했던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플라잉브이·깁슨·펜더 3대의 기타 중 어떤 것을 가장 아끼느냐는 질문에 “용도가 다 다르기 때문에 우열을 가릴 수 없다”며 각 기타가 어떻게 쓰이는지 눈빛을 반짝이며 설명하는 모습에 ‘록을 하기 위해 창업했다’는 다소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답변을 이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KMTV도 출연했던 기타리스트···CG 빠져 ‘제2의 인생’ 시작=김 대표는 1990년대 ‘록밴드 타운’으로 이름을 날렸던 인천 출신이다. 과거 전두환 정권이 전쟁에 대비한다는 명목하에 이 지역 대부분의 주택에 지하 벙커를 설치했는데 저렴한 데다 방음도 잘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전국 록밴드들이 몰려갔다. 사하라·블랙신드롬 등 당시 헤비메탈 신에서 인정받던 밴드들도 포함됐다. 김 대표는 “어릴 적부터 머리 길고 워커 신은 형들이 주변에 많았다”며 “이들과 교류하다 보니 16세 때부터 자연스럽게 록에 빠져들게 됐다”고 회상했다.
겨우 스무 살의 나이에 데뷔 기회도 얻으면서 성공을 거머쥐는 듯했다. 김 대표가 몸담고 있던 밴드 ‘씨키즈’는 1994년 전국 록 콘테스트에서 1등을 거머쥔 후 1년도 되지 않아 톰보이 록 콘테스트에서도 입상했다. 당시 총상금이 1억 원에 달했던 대규모 콘테스트였다. 수상에 힘입어 씨키즈는 1995년 해외 유명 음반 레이블 ‘폴리그램’을 통해 1집을 낸다. KMTV·지상파 등 각종 유명 음악 방송에 출연하며 반짝 주목을 받았지만 이후 계약이 불발돼 김 대표는 큰 상실감에 휩싸였고, 이내 입대를 택했다.
제대 후 김 대표는 다시 한 번 록밴드에 입단해 재기를 노리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결국 그는 음악으로 돈을 벌기보다는 원하는 음악을 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돈을 어떻게 벌까 궁리하던 차에 우연히 ‘3DS Max’라는 3D 모델링 프로그램을 접하게 되고 김 대표는 여기에 완전히 매료돼 하루에 8~10시간씩 화장실도 가지 않고 연습에 몰두한다. 그렇게 1년 반을 보내니 실력이 무르익었고 당시 업계인들 사이에서 유명하던 커뮤니티 사이트에 작업물을 올렸더니 댓글과 좋아요가 쏟아졌다. 이에 힘입어 김 대표는 당시 여러 커뮤니티에 흩어져 있던 강좌들을 한데 모아 제공하는 커뮤니티를 따로 만들었다. 김 대표는 “당시 가입자가 수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며 “분기별로 정기 모임을 열었는데 200~300명의 정원이 몇 초 만에 마감될 정도로 인기였다”고 회상했다.
당시 사이트를 통해 들어오는 의뢰만으로도 김 대표는 월 500만~1000만 원 이상의 수입을 거둬들였다. 그러다가 2003년 ‘3D CORE’라는 이름으로 개인사업자를 냈고 이를 2006년 법인으로 전환한 후 2012년 비브스튜디오스로 이름을 바꿔 현재까지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 ‘외주 제작사’ 탈피 위해 VR 콘텐츠 도전···그리고 찾아온 최대 위기=김 대표는 창업 이후 첫 10년은 이상할 정도로 어려움이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노는 데 돈을 많이 썼는데도 돈이 잘 벌렸다”는 게 그의 표현이다. 하지만 사업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김 대표의 ‘감’ 덕이 크다. 매번 적절한 시기에 사업 영역을 확장해 성공한 것이다. 건축·인테리어 이미지·영상 제작사로 시작했던 비브스튜디오스는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매출이 80% 이상 빠질 위기에 처하자 광고업으로 재빠르게 전환해 제일기획을 거래처로 확보한다. 이후 기아차 ‘K9’ 디지털 광고를 맡게 되며 승승장구하고 2010년대 초중반에는 일반 광고보다 단가가 높은 게임 시네마틱 영상에 도전해 ‘서머너즈 워:천공의 아레나’ 광고로 대박을 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승승장구하면서도 외주 업무가 대부분인 것에 대해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단순히 타인의 창작물을 시각화해주는 것을 넘어 좀 더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며 “결국에는 우리만의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고민 끝에 고른 게 VR 콘텐츠였다”고 전했다. 마침 당시는 페이스북(현 메타)이 오큘러스를 2조 4700억 원에 인수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VR 열풍이 불던 때였다. 수년간의 투자 끝에 2017년 개봉한 VR 영화 ‘볼트:체인시티’가 미국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선댄스영화제에도 초청되는 등 성과를 거두며 이번에도 어김없이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면서 탈이 났다. 2017년 인천 송도에 조성한 VR 테마파크가 흥행하자 곧바로 2019년 잠실 롯데월드몰에 VR 전용 극장을 냈던 게 화근이었다. VR 콘텐츠를 체험하는 놀이공원에 가까웠으나 ‘어벤져스’ 등 일반 영화 수준의 퀄리티를 기대했던 일반 성인 관객들에게는 환영 받지 못했던 것이다. 김 대표는 “초중등생이 아닌 일반 성인을 대상으로 사업을 한 게 패착이었다”며 “최소 몇 백억 원은 투자해야 하는 사업을 몇 십억 원만 투자해 급하게 시작하니 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곱씹었다. 야심 차게 준비했던 사업이 실패하며 김 대표는 대출까지 막히는 등 창업 이후 처음으로 큰 위기를 맞는다.
◇VR 다큐 ‘너를 만났다’로 화려하게 부활···내후년 중 상장 목표=어떻게든 회사를 살리기 위해 쉴 새 없이 영업을 뛰던 와중에 김 대표는 MBC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는다. 세상을 떠난 아이를 VR로 구현해 엄마와 다시 만나게 한다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해보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민감한 내용인 만큼 자칫하면 회사가 큰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프로젝트였다. 턱없이 적은 예산 또한 걸림돌이었다. 사측은 기술적 완성도를 위해서는 최소 8억 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나 전체 제작비는 고작 1억 원에 불과했다.
그래도 김 대표는 고심 끝에 도전을 택했다. 희박한 확률이더라도 성공할 경우 회사를 단번에 일으킬 수 있겠다는 희망에서였다. 주어진 예산만으로는 기술 완성도를 높일 수 없는 만큼 엄마의 입장에서 심경을 담아내는 ‘스토리텔링’에 주력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다행히도 김 대표의 ‘감’은 맞아떨어졌다. 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가 2020년 초 방영 이후 신드롬급 흥행몰이를 한 것이다. ‘너를 만났다’는 단순히 오락용으로 인식됐던 VR 기술이 감동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이끌어내며 유튜브에서만 3300만 회에 달하는 누적 조회 수를 기록했다. 폭발적인 반응에 국내 언론은 물론 BBC 등 유력 외신으로부터도 취재 요청이 쇄도했고 회사는 순식간에 다시 일어났다. 무모한 도전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너를 만났다’ 이후 비브스튜디오스는 지난 10여 년과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고속 성장하고 있다. SK텔레콤·DS자산운용 등이 잇따라 투자에 나섰고 지난해 말 80명이던 직원 수는 현재 200명 이상으로 급증했다. 자금 상황이 여유로워진 만큼 메타버스 신사업 투자도 공격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곤지암에 버추얼스튜디오를 연 데 이어 올해에는 버추얼 휴먼 ‘질주’를 선보이고 최근 멜론뮤직어워드(MMA)에서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다.
2024년 내 기업공개(IPO)를 앞둔 만큼 내년 스케줄은 더욱 빡빡하다. 우선 버추얼 프로덕션 통합 제어 솔루션인 ‘VIT’를 내년 중 북미 시장에 선보인다. 또 버추얼 휴먼 제작 솔루션 ‘비플’의 상용화 버전을 출시해 누구나 버추얼 휴먼을 만들 수 있도록 접근성을 확 높이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로커’로서의 노하우를 십분 발휘해 작고한 스타들을 한데 모은 VR 콘서트도 선보일 예정이다. 장국영 등 아시아권 가수들은 물론 영미권 유명 가수들의 복원도 논의하고 있다.
김 대표는 “내년은 비브스튜디오스가 솔루션 회사로 거듭나는 한 해가 될 것”이라며 “아티스트로서의 경험을 충분히 살려 비브스튜디오스를 세계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솔루션 회사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김세규 대표는
△1975년 인천 △1995년 록밴드 C-Kids 멤버 △2003년 3D-CORE 설립 △2012년 비브스튜디오스로 사명 변경 △2017년 ‘볼트:체인시티’ 미국 시네퀘스트 VR FEST 애니메이션 부문 최우수상 수상 △2020년 MBC VR 다큐 ‘너를 만났다’ 제작 △2020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 표창 △2021년 방탄소년단·TXT·엔하이픈 오리지널 스토리 영상 제작 협업 △2022년 TV조선 한국의 영향력 있는 CEO 선정 △ 2022년 한국콘텐츠진흥원 메타버스전문위원 위촉
정다은 기자 downright@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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