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도 흑자도산 남일 아냐"… 비주력사업 팔아 빚부터 줄인다

오대석 기자(ods1@mk.co.kr), 강두순 기자(dskang@mk.co.kr), 임영신 기자(yeungim@mk.co.kr), 조윤희 기자(choyh@mk.co.kr) 2022. 12. 6.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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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대기업 41곳 CFO 대상 긴급 설문조사

내년 경영환경 조사

"자금조달이 어려워져 현금을 충분히 확보해놓지 않으면 '흑자도산'하는 기업이 나올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적지 않다.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어 빚부터 갚아 재무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중소·중견기업은 물론 대기업 재무담당 임원들조차 "자칫하면 큰일이 날 수 있다"고 토로할 만큼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대형 은행에는 이전엔 보이지 않던 5대 그룹 재무담당 고위 임원이 자금 조달을 논의하기 위해 직접 찾아왔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기업들이 내년 경기 침체를 대비해 유동성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본시장 프리미엄 뉴스 서비스인 매일경제 레이더M이 국내 41개 대기업 최고재무책임자(CFO)와 재무담당 임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내년 최우선 재무 목표(복수 응답)로 '비주력 사업 처분 또는 부채 감축'(56.1%)이 상위에 오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금성 자산 확보를 최우선 재무 목표로 설정한 기업도 전체 응답의 절반(53.7%)을 넘었다. 4곳 가운데 1곳은 비용 절감(26.8%)을 꼽았다.

이 같은 결과는 대기업들도 내년 경기 침체를 상당히 위협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5대 그룹 재계 고위 관계자는 "반도체 배터리 등 새로운 먹거리 사업에 대해 2020~2021년 상당한 국내외 투자를 단행한 기업이 많다"며 "대규모 투자를 지속해야 하는 상황에서 내년에 실적이 악화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최대한 비용을 줄이고, 유동성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내년 기업 재무전략을 어떤 방향으로 세우겠냐'는 질문에 참여 기업 재무담당자의 70.7%가 '보수적'이라고 답하는 등 기업들의 경계 심리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시장 분위기는 재무건전성이 높은 기업들조차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 중견기업 CFO는 "경기 침체로 내년 성장 여부를 장담할 수 없지만, 만약 내년에 실적이 좋아진다고 해도 마냥 안심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채권시장의 돈맥경화가 잘 풀리지 않자 금융기관을 찾는 대기업이 늘고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9~10월 채권시장 경색이 한창 심할 때 자금 융통에 비상이 걸리자 대기업 고위 임원이 직접 나서서 은행 대출금리와 한도 등에 대해 문의하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올 초만 해도 은행이 대기업을 찾아가 대출 영업에 나섰지만 지금은 거꾸로 대기업이 은행에 '자금을 빌릴 수 없냐'며 찾아오는 상황"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대출 수요가 급증하면서 대기업 대출금리가 치솟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0월 대기업의 평균 대출금리는 연 5.08%로 2012년 8월(5.1%) 이후 10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신규 취급액 기준으로 10월 대기업 대출 중 금리가 5% 이상인 대출 비중은 48.1%에 달했다. 지난해 10월(1.7%)과 비교하면 무려 28배로 커졌다. 대기업 대출금리가 6~7%인 대출 비중도 12.6%나 됐다. 10월 은행의 대기업 대출 잔액은 전달에 비해 9조3000억원 불어난 216조5000억원으로 집계됐다. 10월 기준 관련 통계가 작성된 2009년 6월 이후 가장 큰 폭의 증가세를 기록했다.

주요 그룹 재무담당 임원은 "내년 1분기부터 미뤄놨던 회사채 만기가 도래할 텐데 최대 고비를 맞을 거 같다. 한계 상황에 몰리는 기업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어 보인다"며 "일단 현금을 확보해 유동성 위기 상황 등에 대비하고 동시에 미래 먹거리 발굴을 위한 신규 투자 기회 모색도 게을리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털어놨다.

어느 때보다도 우호적이지 못한 대외 환경은 기업들을 움츠리게 하고 있다. 기업들은 자금 운영 위협 요소(복수 응답)로 금리 상승(75.6%)과 이에 따른 경기 부진(85.4%), 실적 악화(26.8%)를 꼽았다. 또 단기자금 시장 경색 여파가 내년에도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자금조달 금리가 높아질 것이라고 예상한 응답자가 68.8%인 반면, 올해와 비슷할 것으로 예상한 경우는 26.8%에 불과했다.

최근 자금시장 경색이 발생한 원인(복수 응답)으로는 '금리 상승과 한미 금리 역전 등 시장 상황 급변화'가 78%로 가장 많이 지목됐으며, 레고랜드 사태(51.2%)와 정부의 늦장 대응(24.4%)도 주된 요인으로 꼽혔다. 예상 기준금리 수준은 한국이 3.75~4.0%(43.9%), 미국이 4.50~4.75%(36.6%)라고 응답한 비중이 가장 높았다. 기업 재무담당 임원들은 대체로 인수·합병(M&A) 시장이 위축될 것(58.5%)으로 전망했지만, 경기 침체 등에 따른 한계 기업이 늘면서 비자발적 구조조정성 M&A가 늘어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박대준 삼일회계법인 딜 부문 대표는 "기업들이 잇단 악재 속에 위험을 감수하며 M&A를 추진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다만 내년부터 경기 침체에 따른 기업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 M&A 시장이 다시 활기를 띨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미리 현금을 비축한 기업들에는 새로운 사업 확장의 기회가 열릴 전망이다. 한 정보기술(IT) 플랫폼 기업의 재무담당 임원은 "유망한 스타트업 등을 크게 낮아진 기업가치로 인수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대석 기자 / 강두순 기자 / 임영신 기자 / 조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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