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률 9% '알빠임?'… 월드컵이 Z세대 정신 바꿨다
2002년 "꿈은 이루어진다"는 꿈의 실현에 초점
2022년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과정에 주목
과거로 현재, 미래의 가능성 축소하는 시대에 저항
대학생 박모(22)씨는 최근 카카오톡 프로필 상태 메시지를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바꿨다. 3일(현지시간)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 대표팀 선수들이 포르투갈전에서 승리한 뒤 경기장에서 펼쳐 든 태극기에 적힌 문구였다.
한국 대표팀은 앞서 가나전에서 져 16강 진출이 자력으로 불가능했다. 이런 악조건에서 세계축구연맹(FIFA) 랭킹 28위인 한국 대표팀이 9위의 강팀 포르투갈을 상대로 후반전 추가 시간에 골을 넣어 믿기 어려운 역전승을 거뒀다. 9.9%(스포츠 전문 통계 회사 옵타 기준)의 낮은 확률을 뚫고 한국이 16강에 진출하자 박씨는 이 문구에 울컥해 카톡 문패로 달았다.
이번 월드컵을 지켜보며 그는 '알빠임?'의 정신도 다잡았다. '네가 누군지 내가 알 바가 아니다'의 줄임말로 아무리 상대팀의 전력이 강해도 누구인지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의 경기를 치르는 게 중요하다는 뜻으로 요즘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는 표현이다. 박씨는 "한국 선수들의 꺾이지 않는 마음을 보며 '나도 할 수 있다'는 응원을 받는 느낌이었다"며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데 경쟁자가 많아도 상대가 아무리 스펙이 뛰어나도 '알빠임?'의 마음으로 면접을 준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알빠임?'의 자세로 2023년을... '밈'을 넘어서다
'알빠임?' 과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 2022 카타르 월드컵을 계기로 Z세대(1996~2012년 출생)를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고 있다. 누리꾼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명패를 '알빠임?'과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줄줄이 바꿔 달았고, 온라인엔 이 두 문구를 해시태그로 단 글이 굴비 엮이듯 이어졌다. 두 문구는 유행의 척도인 TV 예능 프로그램 자막에도 등장했다. '100만 구독자'를 거느린 문상훈 등 인기 유튜버들도 두 문구를 활용한 영상을 줄줄이 내놨다.
두 문구를 둘러싼 유행의 양상은 '밈'(meme·온라인에서 유행하는 콘텐츠)을 넘어 Z세대의 의지를 표현하는 '세대 정신'으로 자리 잡는 분위기다. SNS엔 '2023년은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시련을 만나도 알빠임?의 자세로 살아가겠다'는 글이 우후죽순 올라오고 있다.
"내 잠재성 증명할 것"이란 선언
이런 흐름은 과거의 결과만을 토대로 미래를 단정적으로 예측해 가능성과 잠재력을 축소하는 빅데이터 시대에 대한 청년세대의 저항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알빠임?'이 남들 즉 사회의 평가에 주눅 들지 않고 도전하겠다는 적극적 자세라면,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은 지금의 나에게 집중하면 길이 열릴 수 있다는 희망의 표현이다. 윤김지영 창원대 철학과 교수는 "모든 것을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데이터 기반 사회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지만 반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란 과거 데이터들로 포착할 수 없고 수치화할 수 없는 측면들이 분명 존재한다"며 "두 문구는 수치화된 데이터 사회의 정형화된 데이터로 축소할 수 없는 나 즉 개인의 잠재성을 스스로 입증해 보이겠다는 의미"라고 진단했다. 과거의 행동 패턴이나 결과들이 현재의 자신을 전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믿음과 열린 미래에 대한 희망이 두 문구에 대한 Z세대의 환호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요즘 청년들은 "단군 이래 최대 스펙을 가졌지만, 단군 이래 최대 희망이 없는 세대"라고 불린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사회는 '초(超)불확실성의 시대'를 직면했다. 대입과 취업 준비 등으로 이 시기를 치열하게 통과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과거의 데이터가 '미래의 정답'이 될 수 없는 배경이다.
"아임 파인!" 초불확실성 시대엔 결과보다 과정
2002년 월드컵에서 "꿈은 이루어진다"는 '붉은 악마'의 외침은 20년이 흘러 "알빠임?"과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전자가 결과 중심의 응원이라면 후자는 과정에 집중한다.
한국 대표팀은 6일 치른 브라질과의 16강 경기에서 1대 4로 완패했다. 하지만 낙담 대신 온라인엔 '전반에 네 골 먹었으면 정신력이 흔들렸을 텐데 끝까지 죽을 것처럼 분위기 바꾼 게 바로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후반전만 보면 우리가 1대0' 등 지지의 글이 수두룩하게 올라왔다.
불확실성 시대의 복판을 지나는 Z세대는 희망적 미래만 외치지 않는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노오오력'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취업 문은 더 좁아졌고 청년 세대의 사회적 자존감은 위축될 수밖에 없는 시기"라며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두 응원 문구는 그래서 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자 그래서 더 서글프게 들린다"고 말했다.
'알빠임?'은 온갖 비바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Z세대가 핀 '우산'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김헌식 카이스트 미래세대행복위원회 위원은 "비하와 혐오가 난무하는 디지털 공간에 주로 서식한 Z세대가 사회적 존재로 자리매김하기까지 마음을 흔드는 요인이 너무 많아졌다"며 "'알빠임?'은 외풍에 흔들리지 않고 나를 지키려는 일종의 보호막"이라고 바라봤다. 박생강 소설가는 "꿈은 이뤄진다가 집단의 의지라면,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은 개인주의 시대의 '으쌰으쌰'"라며 "'알빠임?'은 '난 좋아'란 뜻의 영어 '아임 파인'처럼 들려 스스로에 대한 응원이 같다"고 봤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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