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음악으로 감동 나누는 '81세 현역 피아니스트' 한동일씨[박주연의 메타뷰]

박주연 기자 2022. 12. 6.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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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한국인 첫 국제콩쿠르 우승 ‘1세대 피아니스트’
“정기 연주회 여는 시니어 오케스트라, 얼마나 멋질까요”
피아니스트 한동일씨가 지난 11월 29일 밀레니엄 힐튼 서울의 한 레스토랑에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바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어머니의 나라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며 2019년 영구 귀국해 65년 만에 한국 국적을 회복한 그는 “행복하다”, “감사하다”는 말을 수시로 했다. / 한수빈 기자

[주간경향] “오늘 새 여권을 받아왔어요. 표지색이 초록색이었는데 이번엔 남색이에요.”

그는 만나자마자 한껏 밝은 표정으로 외투 주머니에서 새로 발급받은 전자여권을 꺼내 흔들어보였다. 그러면서 “한국 여권이 미국 여권보다 더 많은 국가를 갈 수 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어머니의 나라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며 2019년 영구 귀국해 65년 만에 한국 국적을 회복한 그는 “행복하다”, “감사하다”는 말을 수시로 했다. 만 13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인 최초로 국제음악콩쿠르(1965년 리벤트리트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한동일씨(81) 이야기다.

지난 11월 29일 그를 만난 건 오는 12월 9일 하트하트오케스트라 공연(서울 강남구 광림아트센터)에 그가 협연한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2006년 창단된 하트하트오케스트라는 발달장애인들로 구성돼 있다. 지금까지 900여 회의 활발한 연주활동을 하며 발달장애인의 재활과 자립, 장애인식 개선을 위해 활동해 왔다. 그가 어떤 인연으로 이 무대에 서는지, 한국 생활은 만족스러운지 알고 싶었다. 무엇보다 1950년대에 ‘천재소년’으로 불리며 한국·미국 양국의 신문과 방송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등장한 그의 지나온 삶이 궁금했다.

그는 영어를 섞어가며 쉼없이 이야기했다. 때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몸동작을 해보이며 생동감 있게 과거 상황을 재연하기도 했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느껴졌다. 인터뷰는 그가 하루 걸러 한 번꼴로 혼자 들러 점심식사를 한다는 남산자락의 밀레니엄 힐튼 서울의 한 레스토랑에서 이뤄졌다. 이 호텔이 오는 12월 31일 영업을 종료한다는 소식에 그는 못내 아쉬워했다.

인천 석모도의 삼상 승영중학교 오케스트라는 전교생 70여명으로 구성돼 있다. 연주가 불가능할 정도의 낡은 피아노로도 아름다운 화음을 들려주는 아이들의 모습에 감동한 한동일씨는 광화문문화포럼 회원들과 함께 그랜드피아노를 선물했다. 오는 12월 9일에는 발달장애인들로 구성된 하트하트오케스트라와 협연한다. / 한수빈 기자

인천 석모도 작은 중학교 오케스트라에
그랜드피아노 기증하려다 시작된 인연
9일 발달장애인 오케스트라와 협연까지

-하트하트오케스트라와는 어떻게 인연이 됐습니까.

“우선 인천 석모도에 전교생 70여명으로 한때 폐교 위기까지 겪었던 중학교(삼산 승영중학교) 이야기를 해야 해요. 그 학교에 전교생 오케스트라가 있으니 한 번 방문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내가 얼마전에 받았거든요. 가서 보고 너무 감동했어요. 전교생이 강당도 아닌 체육관에서 낡디낡은 피아노로도 너무나 아름다운 연주를 했어요. 다음날 오전 7시에 광화문문화포럼에서 내가 특강을 하기로 돼 있었어요. 거기서 이 학교의 딱한 사정과 함께 그랜드피아노를 기증하고 싶은 나의 바람을 이야기했어요.”

-청중의 마음이 움직이던가요.

“내가 어린 시절 소련군에 피아노를 빼앗기고 서울 여기저기를 떠돌며 구걸하듯 피아노를 빌려 연습했던 상황도 말씀드렸어요. 그러자 포럼의 회장인 오지철 회장과 회원들이 나서 모금을 시작했어요. 일주일도 안 돼 그랜드피아노를 살 수 있는 금액이 모아졌어요. 나는 피아노를 직접 골랐어요. 11월 8일 승영중학교에서 기증식과 함께 기념음악회도 열었어요. 나는 슈베르트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을 직접 연주했어요. 오지철 회장은 하트하트오케스트라를 창단한 하트-하트재단 회장이기도 해요. 이 일을 계기로 하트하트오케스트라와 협연하게 된 거예요.”

-발달장애인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와 협연인 만큼 남다른 감회가 있을 것 같아요.

“영광이죠. 우리가 함께 아름다운 무대를 만들기를 소망해요.”

-어떤 곡을 연주하나요.

“나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 가장조 2악장’을 연주해요. 아주 슬프고 아름다운 곡이죠. 앙코르곡도 하나 준비해달라고 해서 쇼팽의 ‘녹턴 20번 올림다단조’를 준비했어요.”

1954년 6월 CBS 인기 버라이어쇼인 <에드 설리번 쇼>(The Ed Sullivan Show)가 미국에 온 한국의 천재소년 한동일군을 인터뷰하고 있다.

북한서 부유했지만, 소련군에 재산 뺏겨
월남 후 서울 떠돌며 피아노 무료 레슨
미 5공군사령부서 연주 후 미 줄리아드로

한씨는 1941년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함흥시 일출동 82번지”라고 구체적으로 말했다. 동생 셋은 아기 때 사망해 2남3녀가 됐다. 할아버지는 과수원 3만 평 이상을 소유한 대지주였다. 아버지는 연희상대를, 어머니는 이화여전을 졸업했다. 장로교인으로 음악을 사랑한 아버지 한인환씨는 함흥 중앙교회에서 교회 찬양대를 지휘했다. 집에는 피아노가 있었고, 찬양대원들은 자주 그의 집에서 연습했다. 그는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다. 1946년 가족은 서울로 피란을 왔다.

-아들이 피아노를 계속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부모님이 고향을 등지고 피란길에 올랐다지요.

“우리집은 굉장히 부자였어요. 아버지는 캐딜락과 할리데이비슨을 몰았어요. 하지만 8·15 광복 후 한반도 38선 이북을 소련군이 점령하면서 우리집 재산을 다 빼앗아갔어요. 그들은 마차 두 대와 함께 들이닥쳤어요. 아버지는 내 아들이 피아노를 치니, 피아노만은 가져가지 말아달라고 사정했다고 해요. 그들은 화가 나서 나를 찾아 죽이라고 했대요. 다행히 당시 나는 할아버지의 과수원에 있었어요. 그 일을 계기로 우리 가족이 피란 온 거예요.”

아버지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한씨의 눈에는 그리움이 차올랐다. 그는 “나의 아버지는 위대하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매일 마포 자택에서 돈암동, 후암동 등으로 이동하며 김성복(전 이화여대 피아노과 교수), 이애내(숙명여대 음대 초대 학장), 신재덕(전 이화여대 음대 학장) 등 피아니스트들에게 교습을 받게 했다. 한씨는 “모두 아버지의 친구였다”며 “그분들은 돈도 받지 않고 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줬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내가 연습하기 싫어하면 아버지는 회초리를 들었다”고도 말했다. 아버지는 서울시향의 전신으로 1947년 창단된 서울관현악단의 초대 팀파니 연주자였다. 1971년 서울시향에서 정년을 마쳤다.

-일생의 큰 기회가 된 1953년 미(美) 제5공군사령부에서의 연주는 어떻게 이뤄진 건가요.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전차를 타고 귀가하는데, 누군가 ‘한 선생님 아니시냐’며 아버지에게 인사를 했어요. 우리의 사정을 들은 그는 당시 혜화동에 있던 미 제5공군사령부 강당에 피아노가 있으니 거기 가면 연습할 수 있다고 알려줬어요. 그 길로 나는 매일 그곳에 아버지 손을 잡고 가서 연습했는데 어느 날 어떤 군인이 내게 다가왔어요. 그는 ‘다음주 한국인과 미국인 VIP를 위한 중요한 쇼를 하는데, 한 곡 연주해달라’고 요청했어요. 1953년 10월의 일이었어요. 나는 멘델스존의 ‘론도 카프리치오소(Rondo Capriccioso Op.14)’를 쳤어요. 연주를 마치자 높은 신분으로 보이는 군인이 무대 뒤로 우리에게 왔어요.”

-새무엘 앤더슨 사령관(Samuel E. Anderson·1905~1982)이지요.

“맞아요. 그분은 통역을 데리고 와서 아버지에게 자신이 나의 스폰서가 돼 미국으로 데려가겠다고 말했어요.”

-앤더슨 사령관이 천재를 한눈에 알아볼 만큼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나보군요.

“노(No). 그분은 음악에 대해 몰라요. 하지만 제 유학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1953년 11월과 12월에 주한미군기지 24곳을 도는 모금 연주회를 열었어요. 내가 연주를 끝내면 관객 사이로 모자가 돌았어요. 미군들은 5전, 10전, 어느 중령은 5달러를 넣었죠. 모자는 금세 수북해졌어요. 이듬해 1월에는 일본 내 미군기지에서도 모금 연주회가 열렸어요. 모두 4350달러가 모였어요. 줄리아드에서는 무조건 장학금을 준다고 했어요. 전쟁 중인 대한민국에서 베토벤을 연주하는 소년을 모두 돕고 싶어했어요.”

1962년 11월 19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 위키피디아 제공

그는 1954년 6월 1일 임기를 마친 앤더슨 중장과 함께 프로펠러 군용기를 타고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했다. 거기서 앤더슨 중장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홀로 뉴욕행 기차에 올랐다. 당시 나이 열세 살이었다. 병역 미필자의 해외 출국을 엄격히 금지하던 시절이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으로 가능했던 일이었다. 뉴욕타임스와 CBS 인기 버라이어쇼 <에드 설리번 쇼>(The Ed Sullivan Show) 등 미국 언론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서 온 신동”이라며 그의 도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는 1954년 뉴욕 줄리아드 예비학교에 입학해 줄리아드에서 학사를 거쳐 1968년 석사를 마칠 때까지 장학금을 받았다.

-미국으로 떠날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기대감으로 들떴어요. 당시 여의도공항에 배웅 나온 어머니가 많이 우셨는데, 철없는 나는 미국에 가는 게 마냥 신났어요.”

-앤더스 사령관과의 인연은 미국에서도 계속됐습니까.

“나의 미국인 아버지예요. 그분은 미국에선 워싱턴 국방성에서 근무하시다 앤드루스 공군기지 사령관으로 전임됐고, 다시 파리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부사령관을 끝으로 은퇴하셨어요. 저와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계셨지만 특별장학금 계좌를 통해 생활비와 학비, 용돈을 지원해주셨어요.”

-학교생활은 어땠나요.

“배재중학교 1학년에 다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건데, 영어가 안 되니 일반학교 6학년부터 시작했어요. 줄리아드 예비학교는 토요일에만 가고, 음악만 가르치니까요. 미국에서 나는 토니로 불렸는데, 영어를 어느 정도 하게 된 후에야 8학년으로 진급했어요. 재미있었어요. 나는 어머니와 이화여전 동창생인 김자경 선생님의 아파트에서 4년을 살았어요. 내게 음악에 대해 큰 가르침을 주신 줄리아드의 로지나 레빈 선생님은 제게 엄마 같은 분이셨어요. 공연장에도 자주 데리고 다니셨죠. 당시 줄리아드 음대생이던 밴 클라이번, 존 브라우닝의 연주를 들으면서도 많이 배웠고요.”

-학교 성적은 좋았습니까.

“석사를 마칠 때까지 줄리아드에서 내 성적은 항상 익셉셔널 아웃스탠딩(Exceptional Outstanding), 즉 EO였어요. EO는 요즘으로 치면 A플러스예요. 하하하….”

-어린 나이에 모든 게 낯선 땅에서 부모도 없이 지냈는데, 외롭지는 않았나요.

“이루 말할 수 없이 외로웠죠. 혼자서 어른들의 세상을 헤쳐나가야 했으니까요. 나는 매일 부모님께 편지를 보냈어요. 어머니도 자주 편지를 써보내셨고요. 그래서 내가 한국말을 잊지 않았어요.”

1958년 6월 극동지역 순회공연에 올라 귀국독주회를 열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를 예방한 그를 “Smart boy!”라고 부르며 장학금을 주고 치하했다.

백악관 초청·국민훈장·25개국서 순회…
어린 나이부터 혼자 연주활동 지속하다
1968년 공황장애 겪은 후 교수로 정착

그는 1956년 미국 카네기홀에서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했다. 1958년 6월에는 극동지역 순회공연에 올라 하와이와 일본을 거쳐 귀국독주회를 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를 예방한 그를 “Smart boy!”라고 부르며 장학금을 주고 치하했다. 1962년 케네디 대통령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1965년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1918~1990)이 심사위원장이었던 제24회 리벤트리트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했다. 한국인 최초의 국제음악콩쿠르 우승이었다. 이후 전 세계 25개국 순회 연주를 하고, 뉴욕필·런던필·로얄필·부다페스트라디오심포니·러시아국립심포니 등 세계 정상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쇼팽 24개의 프렐류드, 베토벤 4개의 발라드와 4개의 스케르초, 8개의 소나타, 슈베르트와 브람스의 소나타 등 다수의 음반을 발매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그에게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여했다.

-최정상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은 만큼 자부심이 컸을 것 같아요.

“웃는 날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인생 최대 위기나 좌절감을 느낀 건 언제였습니까.

“1955년부터 연주활동을 했어요. 어린 나이에 혼자 많은 것을 감당하며 십수년간 연주를 강행하다보니 때론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미칠 것 같았어요. 그래서 1968년 가을에 열린 베를린 연주회에서 일부러 건반을 계속 틀리게 두드렸어요. 내가 세일즈맨처럼 느껴졌고, 너무도 지쳐 있었거든요. 당시 거주지였던 런던 집으로 돌아와 누워 있는데 갑자기 천장과 벽이 나를 향해 돌진했어요. 공포감에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꾹 참았어요.”

-공황장애가 온 거군요.

“이후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그 상태로 2~3주간 거의 쓰러져 좀비처럼 지냈어요. 그러다 한 음씩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당시 나는 4층 건물의 2층에 살고 있었고 전화기는 1층에 있었는데, 어느 날 ‘토니, 미국에서 전화왔어’라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인디애나대학에서 음대 교수로 근무하던 지인의 전화였어요. 교수 자리를 제안하는 내용이었어요. 바로 ‘OK’ 했어요. 그리고 BMW를 주문했어요. 너무 갖고 싶었지만 살 수 없었는데, 교수는 안정적으로 급여가 나오니까요(웃음).”

-당시 명성만으로도 충분히 수입이 많지 않았나요.

“음악가는 연주가 많을 때는 돈을 많이 벌지만, 연주가 없을 때를 대비해 돈을 함부로 쓰면 안 돼요.”

이후 학생 지도와 공연을 병행하며 마음의 안정뿐 아니라 직업적 안정도 찾았다. 아울러 명성도 높여갔다. 1971년에는 프랑스 여성과 결혼해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일리노이주립대, 북텍사스주립대를 거쳐 보스턴대학까지 차례로 옮겨가며 미국에서 36년간 후학을 양성했다. 2005년 울산대 음대 학장 및 석좌교수를 시작으로 일본 히로시마 엘리자베스 음악대학 초빙교수, 순천대 석좌교수를 지냈다.

-부인과는 어떻게 만났습니까.

“음악인들과 여행객이 많이 찾는 런던의 한 뮤지컬 클럽에서 1969년에 처음 만났어요. 아내는 제가 유럽으로 연주하러 갈 때마다 덜컹거리는 낡고 작은 자동차를 끌고 와 함께 여행을 다녔어요. 1971년 결혼해 37년간 살았어요. 함께 한국에 오기도 했지만 아내는 프랑스인임을 강조하며 동행하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2009년 헤어져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아들 둘은 미국에, 왕족과 결혼한 딸은 영국에 살고 있어요.”(한씨는 2010년 한국인 피아니스트와 재혼했지만 다시 혼자가 됐다.)

-2004년 6월 1일 아버지와 한 무대에서 연주한 도미(渡美) 50주년 기념 공연을 인생 최고 무대로 꼽는다지요.

“제가 피아노를 치는 그 무대에 91세의 아버지가 팀파니스트로 참여하셨어요. 그 공연은 아들을 위해 헌신한 아버지를 위해 내가 기획한 거예요.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선수로 뛸 만큼 테니스를 즐기셨어요. 당시 부모님은 미국의 내 여동생집에서 함께 사셨는데 합동 공연 5년 후 TV로 테니스 시합을 보시다가 잠이 드셨고, 그렇게 조용히 생을 마감하셨어요. 어머니는 그보다 앞서 92세에 떠나셨고요.”

2004년 6월 1일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한동일씨의 도미(渡美) 5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가 열렸다. 한씨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가운데 서울시향의 맨 뒷줄에 서서 팀파니를 연주하는 이가 당시 91세의 아버지 한인환씨다. / 한동일씨 제공

2004년 아버지와 함께한 공연 ‘인생 최고 무대’
“어머니의 나라에서 여생” 2019년 영구 귀국
“베토벤 협주곡 4번은 나의 찬송가이자 기도”

2019년 영구 귀국한 후 그는 서울 종로구 홍파동의 홍난파(1898~1941) 가옥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방 두 칸짜리 집을 얻어 살고 있다. “어린시절 마포집이 그랬듯 장독대가 있는 집”이라고 했다. 집에서는 피아노를 치거나 독서를 하고, 종종 밀레니엄 힐튼 서울까지 걸어가 점심을 먹으며 산책한다고 했다. 기차여행도 즐긴다고 했다. 그는 “지난 8월에는 한달반 동안 뉴질랜드를 여행했다”고 말했다.

-뉴질랜드는 무슨 일로 다녀왔습니까.

“지난 8월에 첼리스트 이동우 교수님(한국계 미국인 첼리스트이자 교육학자)이 대장암으로 예순여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는 오랫동안 해외에서 활동하다 KBS심포니오케스트라의 수석 첼리스트로 18년간 일했어요. 이후 울산대에서 교편을 잡다 올 2월 정년퇴임했죠. 그의 아버지와 내 아버지는 함흥 중앙교회를 같이 다닌 절친한 친구 사이였어요. 내가 1957년 미국 캔자스시티에서 연주할 때 그분의 초대를 받아 집에 갔는데, 당시 이동우 교수님은 두 살이었어요. 그랬던 그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찾아갔어요.”

-어떤 대화를 했나요.

“나는 산소호흡기를 끼고 누워계신 그의 침대에 신시사이즈(대부분 건반악기 모양으로 된 전자 악기의 하나)를 걸어놓고 베토벤과 슈만의 곡에 이어 찬송가 ‘우리 다시 만나볼 동안’을 연주해 들려드렸어요. 그러고는 그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의미로 ‘See you later’라고 했어요. 그는 3일 후 세상을 떠났어요. 그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었어요. 하나님은 왜 예순여섯의 그를 먼저 데려가고 여든한 살의 나를 두셨을까요. 장례를 치른 후 뉴질랜드에 가서 매일 걸으며 인생에 대해 생각했어요. 나의 삶도 조금씩 정리해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건강은 어떠신가요.

“제 주치의 선생님이 부산에 계셔서 오늘 KTX 타고 다녀왔어요. 건강검진하고 백신 맞았어요. 건강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요. 하하하….”

-인생의 회한은 없습니까.

“있지만 말 안 할 겁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에요.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이렇게 인도해주시고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게 해주셔서 그저 감사하고 행복해요.”

-수많은 곡을 연주해왔는데, 특별히 사랑하는 곡이 있나요.

“베토벤 협주곡 4번이에요. 이 곡은 나의 찬송가이자 기도라고 할 수 있어요.”

-바람이 있습니까.

“얼마전에 서현석 교수님(전 한예종 지휘과 교수)이 지휘하시는 시니어 오케스트라의 공연에 다녀온 적이 있어요. KBS교향악단이나 서울시향, 광주시향, 전주시향 등 전국의 교향악단에서 은퇴하신 70여분의 연주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예요. 감동적이었어요. 그래서 서 교수님께 시니어 시리즈 정기 연주회를 여는 오케스트라를 제대로 만들어보자고 제안했어요. 나는 이런 일에 힘을 보태고 싶어요. 정부도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어요.”

오후 6시. 창밖은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날씨가 쌀쌀한데도 그는 걸어서 집까지 가겠다고 했다. 하루 한끼만 먹기 때문에 저녁식사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외투를 걸치고 모자를 쓴 노신사는 호텔 뒤편 오솔길에 놓인 계단을 타고 서울역 방향으로 총총히 내려갔다.

박주연 선임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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