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곤의 정담] 정당이 시민의 고통과 절박함에 응답하려면
이창곤의 정담
한국 정당의 핵심 문제는 바로 정치과정에서 정당이 이런 본연의 역할과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에서 정당은 주도적 정책결정자가 아니다. 국정운영의 큰 틀은 대통령과 비서실, 경제관료에게 맡겨두고 “여당은 뒷바라지, 야당은 이를 전면 거부하는 양상”(홍영표 민주당 의원)이 줄곧 이어져 온 게 한국 정당정치의 역사이며, 현주소다.
어떻게 하면 정당이 시민의 고통과 절박한 요구에 응답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정당이 시민의 삶의 질을 드높일 정책을 놓고 경쟁하는 ‘정책정당’, ‘책임정당’이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나?
우리나라 정당정치를 둘러싸고 제기돼온 ‘오래된 질문’이다. 민주주의 성숙과 복지국가 발전과 관련해서도 우리 사회가 짚어야 할 중요한 질문이다. 하지만 이 물음에 관한 우리 사회의 깊이 있는 탐색과 치밀한 논의는 너무나 부족했다. 탐색과 논의가 태부족이었으니 의미 있는 실행과 진전도 응당 없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2015년 발간한 <정당의 발견>에서 “중요한 주제일수록 소홀히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정당 내지 정당정치의 문제가 그렇지 않은가 싶다”고 말한 바 있는 데, 이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정치적 양극화가 일상화하고,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존이 이어지면서 정당정치에 대한 시민의 비난과 질타는 고조되고, 정당에 대한 불신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정당정치의 당사자인 정치인들과 당직자들은 여전히 둔감하다. 이를 제기해야 할 학계의 상황도 심각하다. 현실 정치의 주체인 정당 연구는 직무유기라고 할 정도로 정치학계조차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관련 논문을 찾아보니 그 수가 너무나 적고, 전공자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나마 이뤄져 온 진단도 ‘거품정당’, ‘포괄정당’, ‘간부정당’, ‘선거정당’ 등 해묵은 데다 추상적 수준에서 맴돈다.
대한민국 주요 정당들은 당헌에서 저마다 시민의 행복과 복지국가를 목표를 내걸고 있다. 대표적인 보수정당이자 현 집권여당인 국민의힘은 “국민 각자의 자아실현과 행복을 고양하는 것을 정당의 중심 목표”로 내세운다. 의석수 1위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생명의 가치를 중시하고 안전을 보장하는 사회, 보편적 복지를 추구하는 포용사회 등을 지향한다”고 천명한다. 진보정당을 자처하는 정의당 또한 “함께 행복한 정의로운 복지국가 건설을 위해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개혁과 강한 정당 등을 목적으로 한다”고 표방한다.
이쯤 되면 이렇듯 거룩한 목표에 정책위원회가 일상적으로 가동하는 등 정책활동이 왕성한데, 왜 ‘정책정당’, ‘책임정당’을 운운하는지 모르겠다는 볼멘소리가 이들 정당에서 나올 법하다. 실제 여의도에는 정당마다 소속 의원들이 마련한 정책토론회가 하루가 멀다고 열리고, 의원들 정책연구나 공부 모임도 꽤 활발하다.
하지만 그럴듯한 당헌과 당규가 있고, 전문가들을 불러 수시로 정책을 논의한다고 ‘정책정당’이나 ‘책임정당’이라고 이름할 수 없다. 의원들 정책활동 대부분 당 차원의 기획이나 대응이 아닌 소속 의원들의 ‘개인기’를 통해 이뤄진다. 개인기는 말 그대로 의원 개인의 활동과 업적에 그치기가 다반사다. 대한민국 정당을 두고서 “정치 자영업자들의 모임”이란 말이 나오는 데는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노동을 상품화하지 못한 가난하고 배제된 사람들을 양산한다. 이처럼 시장에서 밀려나 ‘벼랑에 선’ 사람들의 고통과 절박함에 응답하고 그들을 보호하는 일은 사적 자선과 봉사만으로 어렵다. ‘시장에 거스르는 정치’만이 국가권력을 통해 재분배적 합의를 바탕으로 공적 사회안전망을 구축해 이들을 보호할 수 있다. 복지국가는 이처럼 “정치를 통해서” 빈곤과 사회적 배제 그리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다는 희망에 근거”(고세훈 고려대 명예교수)한 정치행위의 산물이다.
정치의 역할은 주요 정당들이 저마다 당헌에서 제시한 것처럼 시민의 행복을 드높일 복지국가 같은 국정의 큰 방향을 결정하고, 나아가 그 방향에 따라 정부가 정책을 집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당이 정치과정에서 이런 역할을 할 때 정책정당, 책임정당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정당의 핵심 문제는 바로 정치과정에서 정당이 이런 본연의 역할과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에서 정당은 주도적 정책결정자가 아니다. 국정운영의 큰 틀은 대통령과 비서실, 경제관료에게 맡겨두고 “여당은 뒷바라지, 야당은 이를 전면 거부하는 양상”(홍영표 민주당 의원)이 줄곧 이어져 온 게 한국 정당정치의 역사이며, 현주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정당이 민주주의 성숙과 복지국가 발전의 주도적 정책결정자로서 제 기능을 발휘하게끔 할 수 있을까. 이는 정당 안의 혁신과 정당 밖의 정치개혁이 동반돼야 비로소 가능할 터다.
김용익 전 의원(민주당)은 “정당의 정책능력을 키우는 것이 문제해결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정당이 관료 의존에서 벗어나고 관료들을 통제할 수 있는 실력과 인재풀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라면서 구체적으로는 “법에 정해진 대로 30%의 정당보조금을 정책연구소에 투입해 정책능력을 작심하고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 정치자금법(28조)은 국가가 세금으로 정당에 지급하는 국고보조금 총액의 30% 이상을 부설 정책연구소에 지원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규정이 지켜진 적은 없다. 필자가 한 정당 정책연구소의 지출 내용을 살펴보니, 정책연구에 지출하는 돈은 국고보조금 전체의 6분의 1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중앙당의 당직자들을 고용하는 데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당 소속 정책전문위원들은 실제로는 정책위원회에서 일하지만, 당 부설 정책연구소의 연구원으로 등록돼 연구소에서 급여를 받는다. 김 전 의원의 지적은 이 점을 바로잡아야 정당의 정책기능이 높아질 것이라는 얘기다.
당직자들은 여기엔 속사정이 있다고 토로한다. 속사정이란 정당법 제30조 ‘유급사무직원 수 제한’ 규정을 말한다. 이 조항은 “정당에 둘 수 있는 유급사무직원은 중앙당에는 100명을 초과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당직자들은 “이 숫자로는 당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정책연구소를 편법 운용을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결국 정책연구소가 정책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제구실을 하도록 하려면 이 규정을 손봐야 한다.
이 밖에도 일상적으로 시민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의견수렴 장치 강화, 정책위원회와 부설 정책연구소의 유기적 관계 정립, 당정협의 개선 및 여·야·정 정책협의체 활성화, 당내 인물 육성, 당원 교육을 통한 정체성 강화, 그리고 무엇보다 의회는 물론 대통령실과의 관계 정립 등 다양한 정당 혁신 목록이 제시된다.
김영배 민주당 의원은 궁극에는 “정치개혁 없이는 정책정당의 길은 요원하다”고 본다. “정부, 정당, 의회 삼자 관계에 견제와 균형에 따른 헌법 수준의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그는 “개헌, 선거법, 정당법 등 대폭 손질”이 해법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이런 거대한 정치개혁이 단기간에 현실화할 수 있겠는가다.
이에 우선 과제로 의원 선출 방식을 현행 소선거구제를 중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로 바꾸는 선거제도 개혁에 집중하자는 의견이 오랫동안 제기돼왔다. 지역구에서 단 한명만 뽑는 소선거구제에선 의원들이 지역구에서 인간관계에 바탕을 둔 ‘바닥 작업’을 하느라 정책에 관심을 쏟을 겨를이 없고, 복지친화성이 높은 진보정당의 의회 진출 또한 어렵기 때문이다.
기실, 이런 정당 혁신과 정치개혁도 궁극에는 유권자, 즉 시민의 정치적 선택에 달려 있다. 지역과 진영에 사로잡히기보다 정책을 통해 표를 선택하는 “현명한 유권자들의 선택”(안철현 전 경성대 교수)이야말로 정책정당, 책임정당으로 가게끔 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일 것이다.
정책정당과 책임정당은 단순히 정당의 정책기능과 책임성 강화를 꾀하자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 제도의 경기장 안에서 민주주의 실질적 내용을 약화하는 행동들이 나타나는”(신진욱 중앙대 교수) 오늘, 그것은 “선거로 선출된 뒤에 권력을 남용하는 정치적 대표자, 당파성만 있고 보편적 규범을 결여한 유권자가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부식시키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기제일 수 있다. 또한 주요 정당이 당헌에서 목표로 내세운 시민의 행복과 복지국가 발전을 앞당기는 길이자 더 나은 민주주의를 향한 길이기도 하다.
이창곤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복지를 중심으로 노동, 주거, 환경 등 사회정책 이슈에 특별한 관심을 쏟는다. <한겨레>에서 팀장과 부장, 논설위원, 부국장 등을 거쳤고,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 <복지의 문법>(공저),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공저), <불평등 한국, 복지국가를 꿈꾸다>(공저), <진보와 보수 미래를 논하다>(편저), <어떤 복지국가에서 살고 싶은가?>(편저) 등이 있다.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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