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중국의 반도체 자력갱생, 강 건너 불 아니다

이길성 산업부 차장 2022. 12. 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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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업 반도체공장들 생산재개
美장비 안쓰는 양산라인 등장
내수시장 배경으로 실력 쌓다
글로벌 공급망 또 흔들 수도
중국 반도체 기업 SMIC 베이징 공장모습./오리엔탈이미지/로이터

최근 중국에서는 수요가 없어 문을 닫았던 관제 반도체 기업들이 갑자기 일감이 생겨 생산을 재개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올 연초만 해도 폐허 상태였지만 다시 가동에 들어간 푸젠성 취안저우의 반도체 공장들도 그렇게 되살아났다. 중국 IT 기업들조차 외면했던 이 반도체 제조사들에 대규모 주문을 맡기는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다.

구세주는 다름 아닌 화웨이다. 미국의 제재로 해외에서 반도체를 사오는 것도, 자체 설계한 반도체를 해외 파운드리에 맡겨 제조하는 것도 어려워진 화웨이가 자국 반도체 기업을 통한 반도체 생산을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베이징·우한·칭다오에서 선전에 이르기까지 일감이 없었던 각지 반도체 기업들을 되살리는 데 화웨이가 투입한 자금이 558억달러에 이른다는 게 일본 닛케이 추산이다. 화웨이로선 미국 기술과 장비를 쓰지 않는 독자 공급망을 만들거나 죽거나 외에 다른 선택은 없기 때문이다.

화웨이가 생존을 위한 반도체 게릴라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미국의 대중(對中) 반도체 추가 공습은 끊이지 않았다. 지난 10월 바이든 행정부는 14나노 이하(낸드는 128단 이상) 첨단 반도체 제조용 기술과 장비, 인력의 대중 수출을 전면 금지했다. 중국에 진출한 미 반도체 기업들은 하루아침에 중국을 떠났고 중국 업체가 고용한 미국의 반도체 기술자도 모두 철수했다. 포성 없는 반도체 전장에서 ‘21세기판 됭케르크 대철수’가 벌어지면서 중국 반도체 업체 모두가 화웨이 처지가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이 역설적으로 중국 정부가 그간 아무리 애써도 하지 못한 일을 가능케 하고 있다. 첨단 반도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전에 없던 절박함이 생겨난 것이다. 중국 정부는 2014년 이후 반도체 산업 육성에 1조2000억위안을 쏟아부었다. 천문학적인 돈을 뿌리고도 만들지 못한 게 중국산 반도체에 대한 수요였다. 해외 반도체를 살 수 있는데 굳이 저품질의 중국산을 사려는 기업이 없었던 탓이다. 이젠 스스로 만들고 소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가장 상징적인 변화가 중국 최대 반도체 기업 SMIC가 미국 기술·장비를 쓰지 않는 생산 라인을 만든 것이다. ‘Non A’로 불리는 이 라인에선 당장은 회로 선폭 40나노미터의 저사양 반도체를 만들 수 있고, 2년 뒤 28나노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애플 아이폰용 반도체 선폭이 4나노인 점을 고려하면 갈 길이 한참 멀고, 그나마 네덜란드 ASML, 일본 캐논 같은 비(非)미국 장비 업체가 계속 장비를 대줘야 생산이 가능한 상황이다. 그러나 SMIC의 시도는 첨단 반도체 독자 생산을 향한 진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당분간 지구촌은 TSMC와 삼성, 인텔 등이 만드는 첨단 반도체를 쓰는 나라들과 구닥다리 국산 반도체를 쓰는 중국으로 나눠질 것이다. 아이폰과 테슬라를 살 수 있는 중국 부유층과 달리 그 정도 구매력이 없는 보통의 중국인들은 10~20년 뒤떨어진 국산 제품을 써야 한다. 수억 명에 이를 그들 덕분에 중국 반도체 업체들도 버티며 기술력을 쌓아갈 것이다.

하지만 일본·유럽을 합친 것의 1.5배가 넘는 인구를 가진 중국이라도 글로벌 공급망과 절연된 독자적인 반도체 공급망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첨단 반도체 없이는 미국 추월이라는 목표 달성은커녕 산업 전반의 퇴보가 불가피하다. 중국이 결국엔 자신들의 자원과 시장을 지렛대 삼아 미국과 타협하고, 글로벌 공급망을 또 한번 뒤흔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그때의 중국 반도체 시장은 중국 기업들이 크게 잠식한 뒤일 가능성이 크다. 중국 반도체 위기는 한국에 결코 강 건너 불이 아니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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