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어린이의 얼굴을 하지 않기에…“들을 때까지 외치고, 볼 때까지 써야 한다”[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

기자 2022. 12. 5.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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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전쟁과 난민
그림책 <숨바꼭질> 삽화
전쟁의 참상을 겪는 건 어린이에게도 비극
어린이가 직접 폭력을 고발하기는 어려워
아동문학이 어린이의 목소리 담아내야 해
세계가 서로 겨눈 총구를 내려놓을 때까지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문학동네, 2015)는 전쟁을 경험한 여성 200명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작가는 여성들의 전쟁 경험을 전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쓰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건 모두 남자들이 남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준 것이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 우리는 모두 ‘남자’가 이해하는 전쟁, ‘남자’가 느끼는 전쟁에 사로잡혀 있다. ‘남자’들의 언어로 쓰인 전쟁. 여자들은 침묵한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할머니의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나의 엄마 이야기도. 심지어 전쟁터에 나갔던 여자들조차 알려 들지 않았다.”(<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17쪽)

여성 역시 군인으로 참전했고, 후방 업무를 지원했음에도 여성의 목소리가 삭제된 이유는 전쟁뿐 아니라 역사 서술 자체가 - 실은 세계의 구성과 작동이 -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글은 남성 중심의 세계에 여성의 목소리를 기입하는 작업이다. 세계를 조직하는 소수가 아닌, 그들이 조직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다수의 목소리를 담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의 다른 저서 <아연 소년들>(문학동네, 2017), <체르노빌의 목소리>(새잎, 2011), <마지막 목격자들>(글항아리, 2016) 역시 전쟁이나 원전 사고 피해자 수백 명을 인터뷰한 목소리를 모아 새 역사를 쓴다.

그중 <마지막 목격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고아 101명을 인터뷰한 책이듯 여성의 전쟁 경험에 대한 그의 시선을 어린이에게로 가져올 수 있겠다. 즉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전쟁은 어린이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고도 바꾸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전쟁 경험은 참전을 포함해 전쟁에 상흔을 입은 모든 이의 일일 텐데 어린이의 목소리 또한 잘 알려지지 않았다. 폭력은 늘 가장 약한 이들에게 먼저 향하며 강한 타격을 입히니 어린이에게 전쟁은 어른보다 더한 경험일 게 분명한데도 말이다. 언뜻 <안네의 일기>(안네 프랑크, 책세상, 2021) 정도가 떠오른다.

물론 어린이가 자신의 목소리를 텍스트에 직접 담거나, 어른이 어린이의 목소리를 받아 적어 텍스트로 널리 알리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런데 아동문학은 그걸 자신의 일이자 사명으로 삼는다. 문학이라는 형식에 기대어 줄곧 그래왔다. 예를 들어 전쟁 동화는 비단 어린이 독자에게 전쟁을 알려주고 가르치는 목적이 전부가 아니다. 좋은 동화엔 한 어린이 독자가 읽을 어린이의 이야기를 담는다. 전쟁 동화에는 어린이의 목소리로 쓰인 전쟁이 있는 것이다.

대개 어른 작가는 과거 어린이였던 자신을 반추하거나 현재 자기 주변의 어린이와 깊이 만나며 어린이의 목소리를 담는다. 그림책 <나의 개 보드리>(헤디 프리드, 우리학교, 2019)는 10대에 아우슈비츠, 베르겐-벨젠 등에서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작가가 이를 말하는 작품이다. 온 가족이 수용소에 끌려가며 반려동물인 보드리와 헤어졌지만 나와 동생은 살아 돌아와 보드리를 다시 만난다. 작가는 첫머리에서 “안녕하세요. 내 이름은 헤디예요. 지금부터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줄게요”라고 시작하며 이 그림책이 자전적 이야기이자 홀로코스트 증언이라는 걸 분명히 밝힌다. “우리는 살아남아 여기 있어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해요. 그때 우리가 겪은 일에 대해서 말이에요.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니까요.”

몽실언니 권정생 지음 | 이철수 그림 | 창비 | 2012년(초판 1984년)

우리 어린이의 목소리로 쓴 전쟁

우리 어린이의 목소리로 쓴 전쟁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동화는 단연코 <몽실언니>(권정생, 창비, 초판 1984)다. 한국 아동문학의 정전으로 누구나 첫 손가락에 꼽는 이 작품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여성 어린이가 극심한 사회 혼란과 가난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성장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몽실이가 경험하고 증언하는 전쟁은 분명 비극이지만 이념 대립을 넘어서는 몽실이의 휴머니즘은 전쟁의 끝을 새 삶을 일으키는 시작으로 만든다.

전쟁을 말하는 그림책으로는 ‘평화 그림책’ 시리즈를 손꼽을 만하다. ‘평화 그림책’은 한·중·일 세 국가의 그림책 작가들이 과거를 기록하며 어린이가 살아갈 세계의 평화를 모색하자는 목표로 제창한 공동 출간 프로젝트다. 2007년 일본 그림책 작가인 다시마 세이조, 다바타 세이이치의 발의로 시작해 난징에서 세 국가의 작가들이 기획회의를 갖고 공동 출간을 계획했다. 지금까지 총 11권의 책이 출간됐는데 1권 <꽃할머니>(권윤덕, 사계절, 2010. 이하 모두 사계절 출간), 3권 <평화란 어떤 걸까?>(하마다 케이코, 2011), 4권 <경극이 사라진 날>(야오홍, 2011)로 시작해 11권 <춘희는 아기란다>(변기자, 2016)로 마무리된 시리즈는 각국 근현대사의 전쟁을 증언한다. 각각 전쟁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였던 과거를 다시 조명하며 세 국가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미래를 구상한다.

숨바꼭질 김정선 지음 | 사계절 | 2018년

‘평화 그림책’ 시리즈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이억배, 2010), <강냉이>(권정생 시, 김환영 그림, 2018)가 그렸던 한국전쟁은 최근 그림책에서도 등장한다. <숨바꼭질>(김정선, 사계절, 2018)은 당시를 풍속화처럼 묘사하면서도 따듯하고 귀여운 그림체로 연령대가 보다 어린 어린이의 시선과 목소리를 담는다. 이름까지 똑같은 양조장 집 박순득과 자전거포 집 이순득은 한 동네에 살며 온종일 붙어 다니는 친구다. 그런데 어둑한 밤, 짐 보따리를 이고 지며 떠나는 피란 행렬이 문득 등장하고 행렬에는 엄마와 피란길에 나서는 이순득이 있다. 박순득은 떠나는 이순득을 보며 ‘숨바꼭질’을 하자 한다. 박순득이 술래를 자청하며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하고 외치는 텍스트가 여러 페이지에 반복되는 동안 그림은 이순득의 피란길을 보여준다. 줄곧 책의 왼쪽 면에서 오른쪽 면으로 향하는 행렬은 긴긴 피란길을 말하는 그림책의 장치다.

밭두렁 사이에서 잠자고, 강을 건너고, 비행기의 폭격을 피하며 드디어 피란민촌에 정착해 지내던 이순득네 가족은 또다시 행렬에 나서는데 이번에는 행렬의 방향이 그림책의 오른쪽 면에서 왼쪽 면으로 전환된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제 이순득이 술래가 되어 피란을 떠나지 않은 박순득을 찾을 차례다. 하지만 이순득이 돌아온 고향에서 만난 건 폐허가 된 박순득의 집과 가게, 박순득의 개 점박이가 전부다.

이 그림책은 어린이가 전쟁으로 겪은 고난과 이별을 어린이들의 놀이인 숨바꼭질과 중첩시키며 어른과 구별되는 어린이만의 전쟁 경험과 정서를 그린다. 어린이의 경험과 정서를 담아낸 유일한 공간은 언뜻 전쟁의 비극과는 거리가 멀 정도로 따사롭고 환해 보이지만 그 대비가 전쟁의 비극성을 더욱 환기시킨다.

살아남는다는 것! 구드룬 파우제방 지음 | 박종대 옮김 | 봄볕 | 2022년

여전히 계속되는 전쟁과 어린이의 삶

<살아남는다는 것!>(구드룬 파우제방, 봄볕, 2022)은 제2차 세계대전 패망 직전 독일을 배경으로 전쟁의 참상이 어느 국가의 어린이에게도 비켜가지 않는 장면을 보여준다. 구드룬 파우제방은 <핵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보물창고, 2016), <나무 위의 아이들>(비룡소, 1999)에서 전쟁, 평화, 기후위기 등 사회적 주제를 줄곧 이야기해 왔다. 2005년 독일에서 출간된 <살아남는다는 것!>은 공중 폭격으로 지하 방공호 화장실에 매몰된 다섯 어린이가 어둠 속에서 허기와 공포를 이겨내며 끝내 생존하는 이야기다.

이 책에서 사남매와 한 명의 어린이가 서로를 보살피며 생존 가능성에 한 발자국씩 다가가는 과정을 보면 온 몸과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 이전에 사남매가 기차역에서 방공호를 향해 달리고, 서로를 잃어버렸다가 찾고, 방공호 화장실에 갇히는 과정에서는 전쟁이 특히 어린이에게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새삼 알 것 같다. 인파에 밀려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든 상황에서 아이들은 동생을 업거나 무거운 짐가방을 든 채 방공호로 뛰어야 한다. 어른보다 한 걸음씩 늦고 사람들로 벌써 꽉 찬 방공호의 문이 닫히니 다른 방공호를 찾아 또다시 달린다. 자기 목숨 하나를 부지하는 게 절체절명인 상황에서 어른들은 도움을 주기는커녕 가방을 훔쳐가기까지 한다. 그 무엇보다 전쟁이 잔혹한 점은 삶의 전부를 송두리째 빼앗아간다는 사실이다. 사남매의 맏이인 열다섯 살 기젤은 대피령으로 집을 떠나던 순간을 회상하며 말한다.

“집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제 방에 섰을 때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어요. 벽에는 반짝거리는 멋진 스케이트가 걸려 있었어요. 아, 얼마나 갖고 싶었던 건데! 이제 드디어 갖게 됐는데 벌써 헤어지다니! 할머니가 오리털 이불과 맞바꿔 가면서까지 구해 준 바이올린은 또 어떻고요!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면서 얼마나 뿌듯했는데! (중략) 그런데 오늘 밤 기차 안에서 벌써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누군가 내 바이올린을 연주한다면 그것만으로 감사한 일이야. 15분 정도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땔감으로만 쓰지 않는다면….” -<살아남는다는 것!> 46쪽

지금도 여전히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어린이들이 있다. 2011년부터 계속된 시리아 내전으로 400만명의 시리아 난민이 터키에 살고 있고, 이 어린이들이 겪은 전쟁을 터키 아동문학 작가들이 썼다. <전쟁에서 도망친 나무>(귀진 외즈튀르크, 한울림어린이, 2022)는 한밤중 트럭을 타고 시리아를 탈출해 터키의 난민캠프로 온 베쉬르의 목소리이고, <난민 소녀 주주>(치으뎀 세제르, 한울림어린이, 2021)는 차별과 혐오를 겪으면서도 당차게 새 삶을 찾아가는 주주의 목소리다. 주주는 자신이 겪은 전쟁 이야기를 녹음기에 담는다. 이 작품은 주주처럼 어린이 독자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고 다른 이들이 “들을 때까지 외치고, 볼 때까지 써야 한다”(<난민 소녀 주주> 64쪽)고 힘주어 말한다.

“주주, 이야기책이 왜 있는지 아니?”

“아이들 읽으라고요.”

“아냐, 사람들이 이야기를 꺼내 놓았기 때문이야.” -<난민 소녀 주주> 38쪽

위의 인용문처럼 아동문학은 어린이가 읽으라고 쓴 책만은 아니다. 어린이의 이야기를 어른이 대신해 꺼내놓은 책이다. 좋은 아동문학에는 비록 어른이 대신했어도 어린이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무엇에나, 어디에서나, 늘 그러했다.

■김유진



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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