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음악 없는 음악가

2022. 12. 5. 17:3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요즘 나는 이상한 경험을 하고 있다. 피아노를 시작한 지 대략 50년 조금 넘었는데 느닷없이 음악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지난 50년 동안 내게는 음악을 못 듣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연습을 하거나 학생을 가르칠 때 말고는 음악을 듣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고 부담스러웠다. 특히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비발디의 '사계'를 듣는 것은 고통에 가까웠고, 식사 후 그곳을 나올 때까지 많은 인내력이 필요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반대로, 학교 일을 시작한 작년부터 음악을 들을 기회가 거의 없다. 교수 시절에는 수업이나 연습을 하지 않을 때도 옆 연구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있었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없다. 아주 가끔 집무실 옆 강의실에서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장난으로 피아노를 치는 소리도 아름답게 들릴 때가 있다(사실, 학생들은 그 강의실 옆에 총장 집무실이 있는 사실을 모르는 듯하고 앞으로도 몰랐으면 한다…). 그래서 최후의 방법으로 생각해낸 것이 내 연구실에 있던 피아노를 집무실에 가져다 놓는 것이었다. 점심 후 짧은 휴식 시간에 피아노를 잠시라도 쳐볼 부푼 계획이었으나 이마저도 불가능해졌다. 그런데, 차라리 피아노가 없었으면 모를까 피아노가 눈앞에 있는데도 건반조차 만져볼 수 없는 상황이 더 큰 고통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로만 폴란스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주인공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건물 사이에서 허공에 손가락을 움직여 피아노를 연주하며 행복해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그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우리 학생들의 다양한 공연을 관람하면서 무대 위에 있는 학생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음악가로 오랜 기간을 살아온 사람이 이제 와서 새삼 음악과 무대의 가치에 대해 깨우침이 생기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잘 생각해보면 음악은 거대한 예술 장르로 존재하는 것 이외에도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지하철 환승 안내방송 배경음악으로 오래 사용된 비발디 협주곡 '조화의 영감'이나, 빈필하모닉 신년 음악회에 매년 등장하는 마지막 앙코르곡, 슈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은 곡명을 몰라도 흥얼거릴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동차 후진 시 나오는 베토벤의 '엘리자를 위하여'나, 1969년 첫 방영을 시작해 2014년까지 45년간 지속된 최장수 텔레비전 프로그램 '명화극장'의 오프닝 음악 'Tara's Theme'('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OST 편곡 버전) 역시 우리 뇌리에 각인되어 일상 이상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이 음악을 들으면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려주는 무언의 교감 도구가 된 것이다. 실로 음악의 엄청난 힘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이처럼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매일 음악을 듣고 있으면서도 음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음악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단 하나의 소리도 듣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니, 당황함을 넘어 일종의 '분리 불안증' 같은 증세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출퇴근 차 속에서 음악을 듣기 시작했는데 이처럼 음악이 아름다웠던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 생각은 결국 음악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분야는 필연적으로 대립을 생성하게 된다. 그 대립이 때로는 건강한 사회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지만, 현재 우리나라는 그 대립이 사회를 분열시키며 진영논리로까지 번져 나가는 상황에 있다. 음악의 사회적 역할은 기본적으로 화합을 만든다고 하겠다. 무언의 교감을 통해 감동을 느끼게 하고, 그 감동은 사람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화합의 매개체로서의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현재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역할을 음악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통해 위로를 받고,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통해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하고,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를 들으며 상대방을 이해하게 된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아름다운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오늘도 나에게는 음악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연주자를 동경하고 음악이 목마른 이런 공허한 마음이 언젠가는 다시 음악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나에게 더 큰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밤은 내가 좋아하는 쇼팽의 야상곡을 마음속으로 연주해 보련다….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